하이킹 크루 관찰기
해가 서쪽에서 뜬 어느 일요일이었다.
평소라면 아침 9시가 넘어 느지막이 일어나, 스마트폰으로 일요일 웹툰을 싹 다 보고 난 후, 뭉그적거리며 아침밥을 한답시고 부엌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렇게 느지막이 아점을 먹고 과일도 까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금쪽같은 일요일 반나절이 후딱 가버린다. 왜 이리 야속하게 주말 시간은 빨리 가는 건지. 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다른 궁리를 해본다. 자꾸만 바뀌려 하는 몸무게 앞자리가 걱정되기도 하고, 고질병인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운동을 하자 결심했다. 보통이라면 절대 상상하기 힘든 무려 6시 30분에 일어나서 말이다. 다행히 경기도에 사는 특권으로, 집에서 20분 정도 차로 가면 호수와 산이 만나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서 남편은 산을 20km쯤 달리는 트레일 런(Trail Run)을 한다고 했고, 그와는 절대 같이 갈 수 없는 체력을 가진 나는, 산에 조금 오르다가 힘들면 내려와서 호수 물멍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부부라고 모든 취미를 같이할 필요는 없다고, 나의 결심을 합리화해보며...
부지런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할 얘기겠지만, 아침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 줄 전혀 몰랐다.
7시부터 주차장은 만차였고, 주차 안내하시는 분들이 나와 계시지 않으면 교통 통제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기다렸다 겨우 주차를 하고 산 입구로 향하는데, 여기저기 짝을 지어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호수에서 단체 사진을 찍던 30명쯤 되는 무리와, 등산로 초입에 서 있는 20명쯤 되는 사람들은 모두 20대 혹은 많아봤자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토요일 밤까지 술 마시다가 다음 날 오후 2시까지 자도 이상할 것 없는 청춘들이,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기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최소 20명씩 단체로 말이다. 뉴스에서만 보던 등산에 푹 빠진 MZ세대가, 현실로 튀어나와 바로 내 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마침 산 입구에 있던 단체가 우르르 등산을 시작했고, 타이밍이 비슷했던 나도 그들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형국으로, 그들과 산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천국의 계단(?)을 시작으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지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등산객들은 힘들지도 않은지 재잘재잘 끊임없이 대화를 하며 씩씩하게 잘 간다. 반면 뒤따르던 나는 계단 10개에 벌써 폐활량이 바닥나 절로 헉헉 소리가 나고, 벌써부터 체력이 급격히 고갈되는 게 느껴진다. 등산로는 좁고 뒤에서 밀고 오는 무리들도 있어, 뒤쳐지는 발걸음을 재촉해 그들과 속도를 비슷하게 내며 따라갔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이, 계속 힘들다 생각되지는 않았다. 실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호기심이 생겨서 그런지, 뒤에서 몰래 엿듣는 그들의 대화는 재미났고, 그들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흥미진진했다. 예전의 등산의 추억을 더듬어보니 그때 주로 산에서 보던 중장년층 등산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해 고단한 발걸음이 살짝 가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일명 Z세대 등산 동호회, 요즘 말로는 '하이킹 크루'를 바로 뒤에서 지켜보니 몇 가지 특징들이 있었다.
우선 눈으로 보이는 복장의 차이. 빠르게 지나가는 알록달록 등산복과 목에 걸린 화려한 스카프의 5-60대 등산객들과 그들의 복장을 대조해 보니, Z세대의 등산복은 색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등산복 브랜드가 아닌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운동복 브랜드의 검은색 점퍼, 흰색 반바지 등의 무채색을 즐겨 입고 있었다. 그 옷을 그대로 입고 헬스장에 가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차림새기도 했다.
그러나 딱 하나, 신발만큼은 요즘 유행한다는 러닝화 혹은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아마도 산행을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선택이지 않을까 싶다. 아참, 등산을 이끄는 크루 리더 무리는, 일반 크루 멤버들과는 달리 등산화뿐 아니라 등산복, 등산 가방까지 풀 패키지로 오기는 했다. 다만 그 등산 복장이라는 것도, 베이지색 혹은 옅은 카키색 등의 무늬 없는 심플한 세련된 디자인이라, 등산복에서도 세대 차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세대 차이는 아니고, 그들의 대화 내용과 관심사다.
가는 내내 간간히 여기저기서 들리는 대화 주제는 주로 세 가지로 압축된다. 연애, 운동, 일.
자신은 키 크고 운동 잘하는 사람이 이상형인데, 여자친구가 키도 크고 자신보다 헬스장을 더 열심히 갈 정도로 운동을 좋아한다는 한 남성분. 지금 다니는 회사에 미친놈(?)이 있어 회사 생활이 지옥이라는 한 여성분. 러닝 크루와 하이킹 크루를 낱낱이 비교하며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을 보강해야 하는지 분석한 한 남성분. 그중에서도 '등산은 힘들게 올라갔다 내려오기라도 하지만. 러닝은 달리는 끝까지 힘들기만 한 거 아니냐'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변태처럼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속으로 킥킥대기도 하고, 공감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물론 이어폰을 양쪽에 낀 채로, 철저히 무관심한 표정으로 위장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아직 연애사업이 한창일 나이니, 이 크루에서도 각종 플러팅 행위가 보인다. 한참을 걷다 체력이 떨어진 여성 멤버들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기다려주는 남성 멤버들은,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는 등산이 아니라 연애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가방에서 물이랑 간식을 꺼내 알뜰살뜰 챙겨주고, 달랑 10g쯤 나갈법한 가방을 들어준다고 난리다. '오빠가 이런 데 많이 와봤는데, 자기 페이스 대로 가는 게 최고야.'라는 귀여운 허세 섞인 말도 건네더라. 남녀비가 7대 3쯤 되려나.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 멤버를 우르르 둘러싼 남성들의 모습을 '여왕벌 현상'이라고 칭한다는 얘기를 나중에 남편한테 들었다. 여왕벌에게 끊임없이 먹이를 물어다 주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현상. 그러나 하이킹 크루의 목적이 등산이면 어떻고 연애면 어떠랴. 뭐 하나 건져가면 됐지.
게으른 나와는 다르게, 자발적으로 여기 이 시간에 나와 열심히 땀을 흘리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처음 시작은 20명이었지만, 각자 자신의 속도에 맞게 그룹을 지어 무리하지 않는 등산을 한다. 정상까지 오르려는 선두 그룹이 있고, 오늘 처음 합류해 산에 오르는 게 힘든지 쉬어 가는 무리도 있다. 서로를 기다려주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 응원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 예쁘다.
그리고 라떼 생각이 나 잠시 회상을 해본다. 27살 첫 회사에 입사해 토요일에도 근무하던 시절, 하루는 회사에서 단체로 아차산으로 산행을 했다. 같이 산을 오르던 40대 부장님이 헉헉거리며 중간에 멈춰 서서 연거푸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의아했다. 그 부장님은 나에게 오히려 왜 이리 쌩쌩하냐고, 부럽다고 하셨다. 아차산은 동네산 정도로 취급했었는데, 정상에 오르고도 조금 더 걷지 못한 게 아쉬웠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아차산보다 더 낮은 산을 가면서도 힘들어 중간에 다시 내려오기로 한다. 내 나이가 40대가 될 거라는 걸 20대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Z세대의 하이킹 크루들은 부디 등산을 열심히 해서, 40대를 건강히 살아갈 체력을 꾸준히 만들라고, 나도 하나도 못한 걸 그들을 통해 빌어보며 하산을 한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