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통해 본 다양성에 대한 고찰
이번 주는 일명 '외국인 방문 주간'이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기간. 내가 속한 마케팅 부서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고객사 분들을 모시고 큰 콘퍼런스를 진행하는데, 그게 바로 이번주였다. 고객분들은 한국인이지만, 외국계 회사 특성상 발표 연자는 80% 이상 외국인으로 구성된다. 아무래도 바이오 분야에서는 미국이나 유럽 등이 선진국이다 보니, 그들의 앞선 경험과 노하우를 어젠다(agenda)에 녹이는 것이 행사 기획의 핵심 전략이었다. 더 많은 고객분들을 콘퍼런스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번에도 외국 각지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연자 분들을 초청했다. 그리하여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싱가포르, 인도 등 국적도 인종도 다른 총 9명분의 외국인이 한국을 찾게 되었다
콘퍼런스 준비만 해도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귀하게 모신 외국분들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이메일로 계속 소통하며, 콘퍼런스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뿐 아니라 호텔이나 교통편 등에 대한 안내도 진행했다. 추가적으로 콘퍼런스가 끝난 뒤 한국팀 직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는 이메일 초청장을 보내며, 장소와 메뉴를 공유했다. 17년간 회사 생활을 하며 쌓인 내피셜(?)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한 음식은 양념 갈비였기에 망설임 없이 'Korean BBQ'라고 안내했다. 일 년에도 몇 번씩이나 외국 손님들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는데, 한국을 처음 온 사람들이나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Korean BBQ는 들어봤거나 먹어봤다고 했다. 갈비를 먹기 위해 식당을 찾으면 그들은 빨갛게 잘 달궈진 숯이 테이블에 놓이는 순간부터 감탄을 하고, 불판 위에 달린 개별 환풍기가 신기하다는 듯 계속 질문을 한다. 야외 바비큐를 많이 하는 그들이지만, 실내에서 숯불로 고기를 굽는 것은 처음 보나보다. 여기에, 갈비를 굽기도 전 식탁 가득 놓인 반찬을 보고 한 번 더 놀란다. 하도 많이 나오니 이것도 공짜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마침내 숯불에 알맞게 구워진, 육즙 가득한 달콤 짭짤한 갈비를 맛보면 자기도 모르게 'Wow!'라는 경탄의 단어를 내뱉고야 만다. 비장의 치트키인 양념갈비는 한 번도 맛보지 않은 외국인은 있어도, 한 번만 맛본 외국인은 없기에 접대 성공을 보장하는 메뉴 중 하나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발송한 Korean BBQ dinner 초청 메일에, 갑자기 회신이 빗발친다.
한 인도인은 저녁은 불참하겠다고 통보했다. 당황하며 저녁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은 채식주의자라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어서 다른 미국인도 물어본다. 이 식당에 채식 메뉴가 있는지. 동시 다발적으로 싱가포르 사람에게도 문의 메일이 왔다. 자신은 소고기를 못 먹는데, 닭고기나 해산물은 제공되는지 질문했다. 팀원을 시켜 채식주의자가 먹을만한 음식이 있는지 파악한 후 안내 메일을 다시 보내라고 했다. 하필이면 콘퍼런스 준비 기간에 입사한 신입사원인 그는 당황한 눈치다. 부리나케 식당에 전화해 채식 메뉴를 알아본 후 아래처럼 길고 상세하게 메뉴 설명을 메일에 썼다. 잡채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나열하며, 원한다면 달걀도 뺄 수 있다는 친절한 부가 설명도 곁들여서 말이다.
Japchae is made with stir-fried glass noodles (dangmyeon), which are made from sweet potato starch. The dish includes a variety of colorful vegetables and proteins, such as:
Carrots: Thinly sliced for a crunchy texture.
Spinach: Lightly blanched and mixed into the noodles.
Onions: Sliced and stir-fried for added sweetness.
Bell peppers: Often red, yellow, or green, for a burst of color and flavor.
Mushrooms: Usually shiitake or wood ear mushrooms for a chewy texture.
Eggs: Cooked into thin sheets and sliced as a garnish. - We can remove eggs if you want
팀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식당에서 제공되는 반찬이나 메뉴 중 '고기와 달걀을 뺀 잡채' 딱 하나만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깃집에서 수많은 반찬이 제공되는데, 게다가 한국 사람들의 반찬은 대부분 푸성귀나 채소가 아니던가. 알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요리에 동물성 재료가 쓰여, 완전 식물식 채식을 하는 Vegan들은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가령 김치만 하더라도 멸치액젓, 새우 등의 재료가 들어가고, 전채 요리로 나오는 샐러드의 소스에도 마요네즈 같은 동물 유래 성분이 들어간다고 한다. 비빔밥에는 육회나 소고기 볶음이 들어가며, 설령 그 두 재료를 빼고 주더라도 고추장 안에 소고기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많다. 고깃집에서 나오는 된장찌개에는 소고기 부산물들이 들어가기도 하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멸치육수로 맛을 내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는 먹을 수가 없다. 이번에 고른 고급 갈빗집은, 코스로 이것저것 많은 요리들이 나오는 식당이어서 문제없을 줄 알았지만 순전 착각이었다. 묵무침으로 알고 있던 탕평채에도 고기와 달걀지단이 들어갔고, 해초 무침에는 작게 자른 생선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종종 우리 회사로 찾아왔던 인도분은, 회사 근처에 먹을만한 채식 메뉴가 없어 매번 곤란해했다. 동료들이 그를 위해 하나 생각해 낸 방법은 바로 김밥이었는데, 그는 혹시 모를 동물성 재료가 들어갈까 봐 김밥 싸는 아주머니를 계속 불안한 눈길로 쳐다봤다. 우엉, 단무지, 시금치, 당근 등 재료를 하나하나 들고 보여줘야 마침내 안심하고 점심을 먹었더랬다.
사실 Korean BBQ 말고 다른 음식을 찾는 채식주의자들의 요구에 가장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짜증이었다..
콘퍼런스 기획, 준비, 운영, 사회, 고객 응대까지 해야 될 일들은 넘쳐나 우리 팀은 밤낮없이 거기에 매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 와중에 내가 그들의 엄마도 아닌데, 식사까지 일일이 챙겨야 되나 싶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뿐만 아니라 콘퍼런스 중간에 먹는 점심 메뉴도 문제였다. 콘퍼런스 장소가 호텔이라 중식은 뷔페로 제공되었는데, 메일로 채식 메뉴를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어봤다. 만약 채식 메뉴가 없으면 밖에서 도시락을 사서 갖고 와줄 수 있겠냐는 중간 관리자의 요청사항에는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팀원이 메일로 친절하게 채식 메뉴인 잡채를 안내하자마자, 자신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괜찮으니 소고기 대신 닭고기를 넣어 조리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아, 제발 한국 오지 말고 다시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요청들이 다양해 차라리 식당을 바꿀까 싶어 알아봤는데, 장소가 경기도라 채식 전문 식당은 정말 찾기 힘들었다. 요즘 트렌드가 채식이라던데, 이렇게까지 식당이 없었나 싶었다. 서울에는 꽤나 있었지만, 반경 20km만 벗어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특히나 외국 손님들을 모시고 갈만한 깔끔하고 정갈하지만 채식이 주로 제공되는, 그런 곳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문득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삶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많은 경우 회식 자리 자체가 가시방석일 것이다. 회사에서 단체로 밥을 먹으러 가는 경우, 채식주의자들이 먹을만한 음식은 고기를 구울 때 옆에 나오는 버섯이나 양파절임뿐이겠지. 농경사회에서는 채소 위주였던 한국인의 식탁이 언제부터 이렇게 고기와 해물로 가득 찼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해서 잡식성으로 음식을 섭취하다가, 학창 시절부터 그리고 회사원이 되고부터는 대부분이 좋아하는 고기가 단체 메뉴가 되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고기를 안 먹으면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 집 식탁에서도, 회사원들의 식탁에서도, 그리고 친구들과의 식탁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만약 내가 채식주의자였으면 회사 생활도 힘들어졌을 것 같다. '다 함께'를 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별난 인종으로 취급받는 기분이 들었으리라. 중국집에 가면 부장님이 시키는 짜장면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동의가 당연시되던 문화에서 자라온 세대라 더 그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다양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평소 다양성을 환영하며 여러 사람들의 여러 생각에 열려있다고 나름 자부했는데, 채식주의자들의 메뉴 선정에 짜증이 난걸 보니 나는 아직 멀었다. 다양함과 효율성 사이에서 날름 효율과 빠름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제발 한국인의 메뉴 선정에 아무 말 없이 따라주기를 바랐던 건 내 욕심과 오만한 판단이었겠지.
결국 이번에 온 외국 손님들은 갈비 냄새가 나는 식당에서, 잡채를 스파게티처럼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어쩐지 나는 내내 마음 한편이 불편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