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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Dec 27. 2023

여기 라면 싫어하는 사람 한 명 있어요

라면을 싫어한다 하면 왠지 욕먹을 것 같지만

라면을 주식으로 일삼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한참 전이었던 대학원 졸업 시즌.

대학원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졸업 전 중간발표를 하고 왕창 깨져 졸업을 못 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참고글 : 내가 대학원에 왜 갔더라?)

사수 선배가 하던 실험을 거의 복제하다시피 베껴 그대로 했었는데, 나는 실험에 대한 탐구심과 논리도 없이 따라만 했던 거라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다녔던 생명과학 전공 대학원에서는 보통 다양한 조건으로 세포를 키우고 그렇게 키운 세포의 특성을 분석해 논문까지 쓰게 된다.

세포란 사람과 참 유사해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지 않으면 쉽게 병들거나 죽을 수 있다.

즉, 37.5도의 온도와 pH 7.4, 적정 산소와 이산화탄소 농도 유지 및 바이러스로부터 깨끗한 환경 제공 등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는 밤이나 새벽 시간에도 세포는 무럭무럭 자라고 분열하기 때문에, 세포를 키우는 사람들은 밤낮, 주말이 없이 세포를 적정 조건으로 돌봐주어야 한다.


졸업논문 결과가 급했던 나는 졸업을 5개월 앞두고 밤샘 실험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밤샌다고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대학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실험을 해봤던 유일한 시기가 이때였다.

원하는 실험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대학원을 6개월~1년을 더 다녀야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상황만은 피해보고자 열심히 세포를 밤새 키우고 그 세포로 실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렇게 불규칙한 대학원 생활에서 출출함을 달래줄 수 있는 음식은 바로 라면이었다.

컵라면을 대량으로 사놓고 밤샘 실험을 하면서 배고플 때마다 먹었고, 집에 가서 잠깐 눈을 붙인 후 일어나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도 라면이었다.

배가 고픈데 허기를 채울만할, 그러면서도 나의 소중한 시간을 많이 뺏지 않는 음식은 라면뿐이었다


당시에는 배달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점이라, 라면은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던 것 같다.

실험결과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아 우울해하는 나를 달래주러 선배들이 술을 사줬을 때도 마지막 코스는 라면으로 해장을 했으며,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자취방의 손님 초대 요리도 당연히 라면이었다.


하지만 원래 라면을 좋아했던 사람이어도, 먹을 수 있는 게 라면뿐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학교 자취시절부터 대학원까지 도합 7년을 라면을 계속 먹어왔는데, 대학원 졸업을 앞둔 이 5개월 동안 나는 정말 라면을 물리도록 먹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평생 먹을 라면을 이때 한꺼번에 다 먹었던 기분이었달까?


돌이켜보면 나뿐만 아니라 같이 생활한 실험실 선후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하지만 유독 나에게, 라면을 먹던 기억은 대학원 졸업 시절의 우울함과 절망이 어우러져 하나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어찌어찌 졸업은 간신히 했지만, 이 시기 이후 나는 라면을 진심으로 싫어하게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이래 저래 라면을 먹을 기회가 많았다.

부대찌개에 넣은 라면사리가 끓으면 동료들은 나에게 라면이 붇기 전 빨리 먹으라 권했다.

나는 조금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저는 사실 라면 안 좋아해요."


내가 라면을 싫어한다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다시 물어본다.

도대체 이렇게 맛있는 라면을 왜 좋아하지 않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 과연 라면을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처음엔 이런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 구구절절 나의 옛날 옛적 사연을 소개했었는데, 직장생활 17년 차인 요즘은 그마저도 귀찮아져 밀가루 덜 먹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둘러대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나는 사실 라면의 맛 자체가 싫은 아니라, 내가 괴로웠던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서 라면을 싫어하는 것 같다.

라면을 먹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과 겹쳐지고 연결되어 불편하다.


다 잊고 새 출발 했다 생각했는데, 기억이란 생각보다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아 또 다른 나를 형성하나 보다.


대학원이 나에게 잘못한 건 없지만, 내가 그 시절 제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며 느낀다.




이런 나는 라면을 진심으로 싫어하지만, 사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라면 킬러이다.

특히 할머니 손에 커와서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딸아이는 라면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 1위가 라면일 정도로, 스테이크나 한우구이를 넘어서는 위치이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은 다 같이(나만 빼고) 라면을 저녁으로 먹는데, 일말의 양심상 라면 하나만 먹으면 건강을 해칠까 꼬마김밥 정도를 같이 곁들이고 있다.

이 글의 메인 사진도 지난주 목요일 라면 정식을 즐기며, 딸아이가 찍어준 것이다.


진심으로 라면을 면치기 하며 맛있게 먹는 딸과 남편을 보면 가끔 같이 먹어볼까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소망해 본다.

나의 라면에 대한 우울하고 괴로운 기억이,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기억으로 앞으로 대체될 수 있기를...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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