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구류를 사랑한다.
종종 문구점에 들러 오늘은 어떤 신상품이 나왔나 둘러보고, 예쁜 메모지나 형형색의 필기구를 구경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그래서 때론 충동구매를 하기도 하고,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사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하며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남편은 '예쁜 쓰레기'라 칭하는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보물이다.
이런 내가 아끼며 5년 넘게 사용하는 볼펜이 있다.
문구 덕후 사이에서는 스테디셀러 중 하나로, 써지는 촉감이 좋고 볼펜심이 얇으며 색깔이 다양하여 즐겨 쓰고 있다.
아니, 이 볼펜이 아닌 다른 볼펜은 잘 못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볼펜을 처음 쓰게 된 계기는, 이전에 쓰던 수첩 크기의 작은 다이어리 때문이었다.
이 다이어리의 줄 간격이 너무 좁아 여기에 맞는 볼펜이 없었다.
무엇을 써도 너무 글씨가 굵게 나와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우연히 이 볼펜을 문방구에서 접한 이유로 지금까지 손에 놓지 않고 잘 쓰고 있다. 딱 내 취향이랄까?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이 볼펜에 대해 조금 더 소개해본다.
볼펜심을 바디에 끼우는 형태 (리필)
바디 크기와 종류에 따라 3색 - 5색을 한꺼번에 끼울 수 있음
볼펜심 사이즈는 0.28mm와 0.38mm로 나뉨
볼펜심 색은 15종 이상으로 다양함
나는 이 볼펜에 대한 애정을 넘어선 집착으로, 이게 없으면 업무용 다이어리를 쓰지 못할 때가 있어 항상 볼펜심을 몇 개씩 백업으로 구매해 두고 쓰고 있다.
특히나 가장 많이 쓰는 검은색은 3-4개씩 사서 쟁여놓고, 색깔에 대한 욕심도 생겨 5색 볼펜에 만족하지 못하고 볼펜 바디를 하나 더 사 무려 10가지 색깔의 볼펜심을 끼워 항상 갖고 다닌다.
볼펜과 함께하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이 든든하고, 볼펜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세상 초조해진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내가 볼펜의 필기도에 따라 기록을 다시 꺼내보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와도 연관이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글씨를 예쁘게 쓰며, 다양한 색깔로 강조도 하고 밑줄도 그어야 다시 볼 맛이 난다.
얼마 검은색 볼펜심의 수명이 다해 새로 갈아 끼운 후 업무 다이어리를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무언가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미팅으로 미처 볼펜심을 체크하지 못한 채 오후가 되었다.
미팅을 하면서 계속 기록하기는 하지만 계속 불편하고 이상했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볼펜심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아, 이건 그동안 내가 쓰던 0.28mm 볼펜심이 아니라 0.38mm였구나!'
이것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나는 어떻게 0.1mm 차이를 느꼈을까에 대한 감탄과 어이없음의 양가감정이었다.
필기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잘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보통 우리가 판촉물로 많이 받아서 쓰는 볼펜심은 1.0mm 혹은 아무리 얇아도 0.5 ~ 0.7mm이다.
그리고 주변의 웬만한 남성 동료분들은 1.0mm와 0.7mm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볼펜이나 사용한다.
나는 볼펜심의 볼 지름뿐 아니라, 써지는 느낌, 퍼짐과 마름의 정도를 아주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사각사각 써지는지 혹은 부드럽게 굴러가는지, 쓰자마자 번짐 현상이 생기는지 등이 바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나의 예민한 성향을 나름 인지하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초 예민했던 내 성격이 싫었다.
니트 옷은 따가워 못 입겠어 꼭 면티만 고집했고, 냉장고에 한번 들어간 반찬은 따뜻하게 데워달라고 엄마에게 투정 부렸으며, 버스만 타면 냄새 때문에 멀미가 나 부모님 고생깨나 시켜 드렸다.
커서도 이런 예민함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미팅을 하다가 상대방과 대화의 기류가 살짝 이상해지면 바로 눈치가 보였고, 남편과 드라이브를 갈 때 조금이라도 볼륨을 크게 틀거나 에어컨 온도를 1도라도 낮추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예민함을 싫어했다.
남편이나 성격 좋은 동료들처럼 둥글둥글하고 어느 환경에서나 아무렇지 않게 빨리 적응하기를 꿈꿨다.
그렇게 예민함은 내가 앞으로 고쳐야 할 단점으로 생각하고 미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 나는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섬세한 사람이라 재정의 해본다.
마케팅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가, 섬세하게 고객의 니즈에 반응해야 조금 더 빠르고 그들에게 맞는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섬세하기 때문에 업무를 할 때나 집안일을 할 때도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사춘기 딸의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변화를 섬세한 내가 읽을 수 있을 것이며, 동료들의 감정이나 생각도 더 빨리 알아차리고 공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볼펜심 지름으로 시작해서 결국 나의 또 다른 면을 알아차리고, 조금 더 나를 이해해 보게 되었다.
아참, 참고로 나는 그 비싼 만년필이나 3만 원이 넘는 볼펜을 선물해 줘도 못 쓰는, 아니 안 쓰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만의 확실한 취향과 선호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내가 더 이상 싫지 않다.
나를 섬세함과 고유한 취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스스로 인정해보려고 한다.
#글루틴 #팀라이트
PS. TMI - 볼펜에도 국제 규격인 ISO 규격이 적용된다고 한다. (ISO12757-2, Ball point pens and refills) 세상은 넓고 문구 덕후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