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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Jan 09. 2024

맹모삼천지교는 아직도 유효한가

환경 설정의 힘

지난주 금요일은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의 중학교 배정날이었다.

집 근처로 갈 수 있는 중학교는 총 두 군데였고, 아이는 한 달 전부터 친구들에게 여러 소문을 들으며 가고 싶은 중학교를 마음속으로 정했다.


A 중학교 : 통학 거리가 약 3-5분 정도 더 가깝지만, 공부 경쟁이 심하기로 유명한 곳

B 중학교 : 거리는 살짝 멀어도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덜해 딸아이가 선호하는 곳


딸아이의 소망과 다르게 배정 결과는 A 중학교.

집에서 가까우며 정원도 많아, 70%가 넘는 학생들이 A 중학교에 진학한단다.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는(소문으로 듣기에) A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실망한 딸과는 다르게, 아이의 절친은 B 학교로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각종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가고 싶은 학교를 이미 정해 놓은 이 친구는 자신의 인생 계획이 벌써 틀어져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나와 남편은 아이가 친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 곳이나 배정받는 중학교에 그냥 다니면 되는 곳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계획하며 벌써부터 실패감을 느낀다는 아이가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사실 남편과 나는 아이의 교육에 관해서는 아주 '프리'한 편이다.

어렸을 때 남들 다 한다는 한글 학습지도 접해본 적 없이 집에서 놀면서 컸는데, 일하는 엄마 아빠 때문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어쩔 수 없이 태권도, 미술, 줄넘기 학원 등을 오가며 오후를 보냈다.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워킹맘들이라면 많이 공감하실 텐데, 태권도 학원에서는 아이를 안전하게 픽업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잘 돌봐주시기 때문에 아이의 태권도 호불호에 상관없이 '디폴트'로 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츰 학년이 올라가며 예체능 위주였던 학원은 주요 교과 과목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

딸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인 미술만큼은 계속하고 싶다 요청해 매일 1시간씩 학원에 다닌 것 이외에는, 대다수의 친구들이 다니는 영어와 수학 학원을 기본으로 다니게 되었다.

아마도 딸은 친구들과 더 많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영/수 학원을 선택했겠지만, 남편과 나는 내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코로나 시절 집에서 내복 바람으로 줌을 켜놓기만 하고 스마트폰을 보며 딴짓하는 아이가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루 1시간의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학원에서 내주는 퀴즈와 숙제를 하느냐 그나마 공부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심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6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작년 8월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예전에 큰 기대 없이 응모했던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고 시간이 흘러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남편과 나는 새로 이사 온 동네에 대해 정말 무지했다.

우리의 이번 이사 조건은 주 양육자인 남편의 직장과 가깝고, 아이의 도보 등하교가 가능한가 딱 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새로 이사한 아파트 카페에 올라온 글을 보며 남편이 나에게 얘기했다.


"여기 학군이래, 엄마들이 계속 학원 추천해 주는데?"


학군의 개념도 없던 우리는 서울의 대치동이나 목동이 아닌 수도권에도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 따로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당장 아이의 방학이라 남편은 분주하게 여러 학원에 전화를 돌리고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하루는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열이 받은 채 씩씩대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여러 번 레벨 테스트를 보러 갔고, 학부모 대기실에서 코디네이터 분들과 상담을 했는데 대부분의 학원에서의 반응이 아래와 같았다고 했다.


"어머나~~~ 아버님! 아이가 지금 6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으면 어떡해요. 늦어도 너무 늦어요. 앞으로 중학생 되면 어떻게 따라가려고 이렇게 방치하셨어요."


뚜둥.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도 어이가 없었다. 지금 6학년인데 6학년 과정을 학습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아이를 방치했다며 몰아가는 그들의 말에 기가 찼다.


사실 이사 온 동네의 학원들은 우리에게 저 멀리 존재하는 별세계였다.

레벨테스트를 돈 내고 보는 것도, 학원마다 코디네이터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학원에서 20대가 넘는 차량을 운영하는 것도 모두 충격적이고 신기했다.

유명하다고 하는 대형 학원은 웨딩홀보다 훨씬 컸으며, 학부모 대기실은 호텔 뺨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방과 후 2-3시간 수업은 기본이었고, 진도는 최소 1-2학년 앞서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학원을 빠지면 주말에 보충수업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공부를 시켜야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일하는 엄마 아빠로서 별 다른 선택권이 없는 우리는 시간이 맞는 학원에 급하게 등록을 하고 아이를 학원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다.




딸의 중학교 배정 결과를 받은 그날 저녁 가족들과 치킨 파티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나는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6시 30분이면 집에서 아빠와 저녁을 꼬박꼬박 챙겨 먹던 아이가 걱정되어 질문했다.

"학원 8시 넘어서 끝나면 저녁 못 먹어서 배고프지 않아?"


아이는 뭐 그런 질문을 하냐며, 나보다 더 학원 늦게 끝나는 아이가 수두룩하다 대답한다.

자기 친구들은 주말에도 학원을 가고, 밤 12시까지 학원 숙제를 하다가 제대로 잠도 못 잔다며.


나는 이어서 요즘 공부하기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다.


"엄마, 나 전학 오니 전에 살던 곳 애들은 진짜 공부 안 한고 맨날 놀았구나 싶어."

아이의 대답은 예상 외었다.

전학 오고 빡센(?) 학원에 다니니 아이의 마인드셋이 변해가는 게 느껴진다.

당시에는 하루 1시간 수업하는 학원도 힘들다 징징대며 공부하기 싫어했는데, 새로운 학원에서의 평균 학습 시간과 학습량이 올라가니 버거워하면서도 친구들의 진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나 보다.


나는 넌지시 속에도 없는 말을 건네보았다.


"너무 힘들면 학원 안 다니고 집에서 혼자 공부해도 돼."


아이는 자기는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 절대 안 할 걸 알기에, 그냥 학원을 다니겠다고 대답한다.

어휴, 다행이다. 그래도 자기 객관화는 잘 되어서...


나는 아이와 대화하며 '맹모삼천지교'를 떠올렸다.

나는 맹모가 아니라 아이의 교육을 위해 이사한 것은 아니지만, 환경 설정이 사람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조건임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사실 지금도 일부러 회사에 일찍 나와 글을 쓰고 있는데, 집에서 휴가 때 이 시간에 글을 쓰려면 잠과 집안일을 물리치고 해야 되기 때문에 언감생심이다.

그나마 회사 책상에 앉아서 집중 모드를 켜야 시간 내에 글을 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말에 혼자 바깥 산책이라도 해야지 마음을 먹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하지만 평일 출근 전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나를 놓으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환경 설정의 힘을 믿고 올해는 나를 더 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 스스로 놓고, 새로운 것들에  도전해보리라 결심해 본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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