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영화 '타짜' 속, 대담하게 밑장 빼기를 시도하는 사기꾼의 모습? 혹은 탱탱한 수타면을 5분 만에 뽑아 생활에 달인에 출연한 주방장의 모습? 아니면, 주말마다 바다로 떠나는 낚시꾼이나, 토실토실한 감자를 주렁주렁 캐는 농사꾼의 모습?
그 어떤 '꾼'이건 간에, ‘꾼’이라는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한 분야에 몰두했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온 사람들이다. 예술의 경지에 가까운 장인은 아니지만, '꾼'은 조금 더 생활과 실전에 강한 사람이랄까. 몸으로 익히고, 실패를 견디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험하며 배우는 사람들인 것 같다.
이런 '꾼'들이 회사에 모여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올해 1월 부서 이동을 하고, 예전보다 훨씬 다양한 '꾼'들을 접하고 있다. 그전에는 특정 부서 소속이었는데, 지금은 전사 지원 부서에 소속되어 다른 팀 동료들과 일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계속 해온, 마케팅이나 전략기획을 담당하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아졌다. 이들과 함께 일하며 흥미롭게 느낀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말 안 해도, 눈빛으로 통한다
그들은 전문가 집단이다. 내가 마케팅 캠페인에 대해 배경부터 설명하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다. 아니, 한 술 더 떠서, 이 캠페인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다.
"말씀하신 것 중에 앞부분이요, 아, 네 거기 3페이지에 있는 거요. 이거 저희 부서에서 시도해 봤는데, OO방법을 적용하면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지난번에 해봤을 때 이슈 생긴 부분이라 저도 많이 고민해 봤거든요."
맥락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대화가 조금 더 깊어지면,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거 말이에요~~"
"아, 그거요? 안 그래도 그거 논의하려고 했는데."
남들이 들으면, 쟤네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나 싶을 테지만, '그거'라는 단어 하나로 한 시간은 떠들 수 있다. 회의 시간에 눈빛을 서로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합의는 이미 끝나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얻은 업계의 노하우가, 우리의 대화를 간결하게 만드는 것이다.
2. 배틀이 아닌, 배움의 장
'꾼'들은 자신이 쌓은 노하우가, 곧 자부심이자 자존심이다. 그래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두고도, 서로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과의 토론 배틀은, 결코 유치한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 흔한 의견 충돌 예시 : 이거 지난번에도 했다가 폭망한 거 아니에요? 왜 이걸 지금 와서 또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팀장님이 현장에 나가보기나 했어요?
- 꾼들과의 의견 충돌 예시 : 우리 팀에서 분석한 OO데이터에 따르면, 이번 캠페인은 시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대안이 있는데~~~(쏼라쏼라, 중략)~~ 이건 어떠세요?
꾼들의 의견 충돌은, 감정싸움이 아닌 '더 나은 걸 찾으려는' 탐색전에 가깝다. 누가 이겼는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공통의 목적은, '일이 되게 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런 의견 교환을 통해, 서로 배운다. 저 팀에서 가져온 데이터 분석법이 얼마나 정교한지 감탄하고, 프리젠테이션 템플릿을 보며 놀란다. 다음에는 나도 써먹으리라 다짐한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고, 그로 인한 팀 전체의 성장이 일어난다.
3. 기준치는 계속 높아지기만 한다
꾼들과 함께 일할 때도, 부작용(?)이 있다. 각자의 분야에서 이미 쌓아온 노하우가 있는데, 서로를 보며 배우다 보니 역량이 계속 성장한다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선순환 구조다. 학교처럼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니 말이다. 꾼의 입장에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겨를 없이,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다. 누군가 이번 프로젝트를 잘 해내면, 그게 다음에 기본차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지난번 박팀장이 한 것만큼만 하면 돼. 다들 그 정도면 괜찮지?"
박팀장이 얼마나 자신을 갈아 넣어 그 보고서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상사는 뻘소리를 한다.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 다시 내려올 일은 없다. 그리고 '다들'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어제의 '레벨업'이, 오늘의 '숙제'로 다가온다.
꾼들과 함께 일한다는 건, 조금 피곤할 때도 있지만 확실히 재미있기는 하다.
18년 차 직장인이라, 이제 웬만한 건 다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을 보니 경각심이 든다. 그들은 ai를 이용해 몇 분만에 보고서를 만들고,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는 방법을 궁리한다. 어제의 내가 알고 있던 노하우는, 이미 몇 년 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걸 몸소 보여준다. 그들과 언제까지 '함께' 일할 수 있을까, 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회사 내의 '꾼'들이 나에게 주는 건강한 압박감이, 싫지많은 않다. 나도 그들을 통해 계속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듬 더듬이라도 ai를 써보고, 최신 소셜 미디어 트렌드도 알아보고, 요즘 고객의 달라진 니즈를 파악한다. 그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반대로 그들은 나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비록 한물 간 마케팅 경험밖에 없는 라떼 팀장이지만, 확실히 '문제 해결'에 대한 노하우는 더 많다. 고객으로부터의 컴플레인을 겪을 대로 겪어봐서, 항의받는 상황을 어떻게 기회로 만들 수 있을지 알려줄 수 있다. 팀원 간의 마찰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푸는 게 현명한지 알고 있다. 타 부서에서 협조를 안 해줄 때, 그들을 살살 구워삶는 비밀무기도 전수해 줄 수 있으리라.
뭐, 아무튼 이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다. 부디 내가 그들과 일하며 즐거워하는 만큼, 그들도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덜 지루하길, 그리고 조금쯤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 배워 나가는 ‘꾼’들과의 동행.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그 길이 펼쳐질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