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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수다쟁이일지도 몰라

말 대신 글로 푸는

by 수풀림

팀장이 되고 나니, 예전보다 '들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팀장님, 이거 내일까지 내야 하는 신청서인데, 한번만 봐주세요."

"아니, 저 이렇게는 계속 일 못하겠거든요. 자꾸 A팀 김대리가 저한테 자기 할 거 다 미루잖아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실은 제가 다른 곳에 합격해서...이번달 까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팀원들 각자의 상황, 고민, 요청, 항의, 때로는 기쁜 소식까지. 그 모든 말을 마땅히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끊임없이 내려오는 상사의 지시와 고객의 요구 사항모두, '듣기' 영역에 속하는 일들이다. 잘 들어야, 여기에 맞는 해결책도 생각할 수 있기에, 늘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다.


물론 매번 듣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팀장으로서 우리 팀을 대변해, 듣는 것 만큼이나 말도 많이 해야 한다.

"이번 달 시작했던 B 캠페인 중간 결과가 예상보다 낮아, 개선할 수 있도록 계획 다시 짜보았습니다. 지금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이 부분 많이 불편하셨죠? C에 해당되는 건 OO까지 꼭 해결해보겠습니다. 추가적으로 D 관련해서도 내부적으로 논의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사에서 하는 말의 대부분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해야만 하는 말들이다. 팀의 실적 보고, 리스크 해결 방안, 고객을 향한 진심 어린 사과 등등. 시원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오직 사직서를 제출하는 순간뿐이지 않을까. 아니, 동종 업계로 이직하는 경우, 퇴사할 때조차 조용하게 마무리해야 하니 이것도 틀린 말일지도...


회사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면서,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었다.

"팀장 진짜 못해먹겠다. 월급도 별로 안 올려주면서 갈구기만 하고, 완전 명예직이야, 명예직..."

하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은 짜릿해도, 이 도파민은 얼마 못가 사라졌다.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말 못할 비밀은 늘어가고, 술자리에서의 소문은 멀리멀리 퍼지기 때문이다. 너만 알고 있으라고 해준 얘기는, 얘도 알고 쟤도 아는 모두의 안주거리가 된다. 속에 쌓인 이야기들은 많은데 도저히 할 수가 없으니, AI를 붙잡고 신세한탄을 하기도 한다.

"팀원한테 중간보고를 꼭 해달라고 요청했는데도, 잘 안해. 내가 벌써 세 번이나 말했는데도... 이럴 땐 어떻게 해야되?"

금쪽이 팀원과 잘 지내는 방법도 물어보고, 옆 부서 팀장이 시비 걸어서 열받은 내 감정도 토로해본다. 나만의 안전한 대나무숲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기분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종종 말한다. 얘기를 참 잘 들어준다고.

경력과 함께 듣기 스킬도 계속 쌓였다. 아니, 부단히 노력했다. 상대방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알고 싶은 마음도 컸다. 나를 내려놓고, 남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그래야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타인의 진심을,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듣기를 잘 하고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내 얘기보다는, 늘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마흔이 넘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숙제로, 억지로 시작한 글쓰기였다.

쓸 말이 없었다. 한 줄 쓰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내 얘기가 뭐 특별하다고. 회사, 집, 회사, 집만 반복하는 일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생각했다. 팀원과의 갈등으로 머리가 아팠지만, 그걸 글로 끄집어내 더 복잡하게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종이에 사각사각 글씨를 써내려가다보니, 신기하게도 자꾸만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어제 저녁 남편이 했던 웃긴 얘기도 쓰고 싶고, 팔짱을 끼고 표독스레 쳐다보던 전무님 표정도 묘사해보고 싶고, 산지 얼마 안되 잃어버린 이어폰 얘기도 쓰고 싶어졌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들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매번 하던 회의였는데 글감의 관점에서 보니, 회의는 살아있는 심리 상담소 같아 보였다. 회피형 팀원, 잔다르크 팀원, 신중형 팀원 등등. 각자 무슨 마음을 갖고 회의에 참가했을까 궁금해지고, 각 팀원 입장에서 글을 쓰면 어떨까 상상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쓸 얘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쓸 거리 중 하나를 골라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야기들이 서로 자기 먼저 써달라 조르는 것 같았다. 산책을 하다가도 글감이 떠올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쓰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원래는 수다쟁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나 내 안에서 조잘조잘 이야기들이 흘러 나올줄은 몰랐는데...알고 보니 나는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저 회사에서는 팀장의 가면을 써야 하다 보니, 수다 본능을 눌러야 했던 것이다.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이, 비로소 글자로 나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느낌은, 낯설긴 했지만 반가웠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내 얘기만 할 수 있는 공간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가면 속에 숨겨진 내 안의 수다쟁이를,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브런치에 풀어내기 시작했다. 평소 하고 싶던 얘기를, 눈치보지 않고 조금씩 옮겼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더 편하게 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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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지금도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내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내는 삶을 살 것 같다. 글을 쓰는 그 순간은, 직장에서 경험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일 할때 집중력은 10분도 안되는데, 글쓰기를 할 때는 몰입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직장인이 왜 글을 써야되나 누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답하리라.

"당신 안에 잠들어 있는 수다쟁이를 글로 깨워보세요.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인지,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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