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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던 상사들은 다 어디 갔을까

그들이 남긴 한 마디

by 수풀림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신입사원 시절, 나는 운이 꽤 좋았다.

‘일 잘하는 상사’ 들을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A 본부장님.

그분은 성격이 까칠해, 다들 별로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 만큼은 끝내주게 잘하셨다. 남들은 관행적으로 넘어가는 것들도, 그분은 늘 집요하게 본질을 파고들었다. 담배를 피우면서도, 자면서도 일 생각만 하셨다. 업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남다른 분이었다. 결국 그분은 업계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하며 계속 성공 스토리를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점점 더 그분을 신뢰하며, 많은 일들을 맡겼다. 승진도, 업무 확장도 빠르게 계속되었다.


다음은 B 이사님.

커리어 우먼에 대한 롤모델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이미 일을 잘 하심에도 불구하고, 업에 대한 통찰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셨다. 새로 나온 마케팅 툴을 배우고, 몸소 적용하며 익혀 나가셨다.

자기 관리도 엄격하셔서 중학생 아이와 함께 새벽 6시에 일어나, 매일 영자 신문을 보셨다. 팀원들에게도 가끔씩 책을 선물하시며, 인생 조언과 동기 부여도 해주셨다.

그분은 몇 번의 이직을 거치며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 나가셨고, 결국 옮긴 곳에서 임원이 되셨다. 누구나 인정하던 좋은 직장이었고, 그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승승장구하셨다. 그분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첫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가끔 지인들에게 두 분의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존경하고, ‘일 참 잘한다’고 느꼈던 두 분은 모두, 조직을 떠나셨다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떠난 게 아니라 조용히 밀려난 쪽에 가까웠다.

A 본부장님은, 회사가 추진하는 신사업 방향성에 반대하다가 한직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B 이사님은 전사 차원의 조직개편 이후, 신임 리더 눈 밖에 났다. 성과로는 이미 탑을 달리는 분들이었다. 업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이 끝나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들이 잘했던 방식은, 어느 순간부터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당했다. 회사는 교묘하게 그분들의 업에 대한 자존심을 건드려, 회사에서 못 버티고 결국 그만두게 만들었다.


그분들과 퇴사 후 만남을 가졌을 때, 공통적으로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회사 일이 내 전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정말 허무하더라. 그러니까 본인도 회사 다니면서 일만 하지 말고, 밖으로 눈도 돌려봐..."

퇴사 소식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들의 조언이 더 충격적이었다. 지난 10년간 만나면 주로 했던 얘기는, 업계 동향, 최신 기술, 어떻게 하면 이 업을 더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주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커리어 방향성에 대한 고민 상담도, 그분들이 진심을 다하고 있는 일과 늘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뀐 지금, 대놓고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 준비해. 나처럼 되기 싫으면!.


상사들이 그렇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먼 미래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있을 거고, 어쩌면 승진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연차가 차고 나도 그들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의 절절한 외침이 무슨 의미인지를. 회사에서는 그 어떤 직원도, 상황에 따라 대체될 수 있다는 진실을 말이다. 나의 예전 상사들처럼 일을 아무리 잘해도, 회사에서의 효용가치는 유효기간이 있다. 그 시점이 언제 올진 사람마다 다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한다.

회사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기보다, 회사 밖의 나는 어떻게 경쟁력을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회사 명함 없이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말이다.

여태까진 남들에게 소개할 때 늘 OO기업, OO팀장만 얘기하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 회사의 브랜드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그 브랜드를 벗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는 것이다.


등 떠밀려 퇴사하고 치킨집을 차릴 것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된다.

회사를 떠나서도 '나 자신'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궁리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옆을 둘러보니 C과장은 주식투자를 한참 하고 있고, D대리는 퇴사하고 필라테스 강사로 살고 있다. E사원은 유튜브 구독자가 벌써 3만 명이라고 하고, F부장님은 얼마 전 쭈꾸미집을 오픈했단다.

남들의 제2의 삶을 들여다보니 더 불안해진다.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다. 당장 회사 나오면 뭘 해야 될지 아직 전혀 모르겠는데, 그들은 이미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이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남들의 성공을 따라가려는 조급함이다.

남들은 그걸로 성공했지만, 나는 폭삭 망할 수 있다. 성공으로 가는 가시밭길의 여정을 버티지 못해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의 인생이건 취미이건, 모든 건 '나 자신'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작하는 게 막막하다면, 가볍게 내가 어떤 걸 평소에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자. 재미있고 자신감 있는 것부터 조금씩 시도해 보자. 자꾸만 이게 좋아 끌리는 걸 찾고, 그냥 해보는 거다. 가벼운 달리기라도, 독서 모임이라도, 10만 원짜리 주식 투자라도 상관없다.

그 하찮은 작은 ‘좋아함’과 '시도'가, 회사 밖의 나를 지탱해 줄 첫 단서가 될지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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