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가기 말고, 함께 가기
얼마 전 각 부서에서 신제품 런칭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들이 참석하기 때문에, 모두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발표를 잘하면 칭찬과 인정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윗사람들 눈 밖에 날 수 있어, 다들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마디로 말해 '잘하면 한 방에 뜨고, 못 하면 오래 기억되는' 자리였다.
최종 발표를 위한 중간 발표날(생각보다 이런 중간보고가 많다). 여러 부서 중 탑클래스라 불리는 A 부서에서 준비한 내용을 듣는데, 뭔가 이상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막내 사원이, 정제되지 않은 자료를 스크립트를 보고 읽는 것이었다. 원래 저 부서 수준이라면, 중간발표 자리에서 박수갈채는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그 사원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가다가, 한숨으로 끝을 냈다.
평소와 다른 A 부서의 모습에 의아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이사님, 이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A 부서의 중간 관리급 임원인 B 이사는, 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금세 파악하고 대답해 주었다.
"신제품 담당자가 막내 사원이라, 그 친구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많이 부족해 보였죠? 저도 알아요. 휴... 그런데 직접 해봐야 조금씩 늘잖아요."
그러면서 자기가 발표자료를 만들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백했다. 막내 사원이 짜온 계획은 엉성했고, 그대로 발표하면 사장님한테 깨질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 밤을 새워서 발표 자료를 의욕적으로 만드는 팀원을 보며, 마음을 고쳐 먹었단다. 조바심 내지 말고, 잘할 때까지 기다려 주자고. 피드백을 주며, 더 나은 자료를 만드는 과정을 도와주기로 말이다.
B 이사님을 지켜보며, 어쩌면 그 속에 사리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봤다.
믿고 맡긴다는 게, 당연한 말 같지만 절대 쉽지 않다. 이 상황에서, 차마 사장님 앞에 내놓기 힘든 자료를 보며 얼마나 잔소리가 하고 싶었을까. 당장이라도 발표 주자를 갈아 치우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줬다.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하고, 발표할 땐 어디서 강조해야 하는지. 늦은 밤까지 날아오는 수정안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피드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이 발표의 최종 책임자인 전무님의 근심 어린 시선도 직접 감당해 냈다.
"제가 책임지고 잘 준비시킬 테니, 이번 한 번만 맡겨 주세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마 본인도 불안함이 때때로 올라왔을 것이다. 당연히 원하는 대로 자료가 바로 뽑아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러다 망할까 봐 걱정했겠지.
내가 이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성과와 인정이라는 지름길로 가기 위해, 발표를 잘하는 팀원으로 선수교체를 외쳤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설득했겠지. 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이게 팀을 위한 최선이라고 말이다. 전무님 걱정을 양념으로, 핑곗거리로 갖다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팀원들 입장은 다르다. 매번 잘하는, 잘해 보이는 팀원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될놈될(될 놈은 된다)이라고 생각하며 무력감부터 들겠지. 그 팀원들의 보조 역할을 하기 위해 내가 여기 있는 건가 싶은 마음도 들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도전적인 일에 절대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의욕도, 책임감도 없어지며, 성장 가능성이 멈추는 것이다.
팀장은 사람을 통해 일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모든 걸 다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팀원들이 어떻게 일할 지를 알려주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람. 결과만 빠르게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사람이 자라게 해주는 사람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은 답답하고, 생각보다 많이 느리다. 절대 내 마음 같이 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 '참다'의 정의를 찾아보니, 유의어로 '견디다, 기다리다, 무릅쓰다, 감당하다' 같은 단어가 나왔다.
생각해 보니 팀장의 역할은, 부모의 역할과 비슷한 점이다. 내가 직접 해주면 더 빠르고 쉽겠지만, 아이가 스스로 해낼 때까지 기다리는 역할. 스스로 해봐야 혼자 힘으로 서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팀장도 마찬가지다. 내가 참고 기다린 그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는 처음이 될 수 있다.
팀장은 결국,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팀원이 조금 서툴더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주는 팀장이, 감히 좋은 팀장이라 말하고 싶다.
때론 속이 타고, 마음이 조급해도 그 과정을 지켜봐 주는 사람. 참는다는 건, 견디는 일인 동시에, 사람을 키우고 관계를 지켜나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정말 쉽지 않은 그 길을 인내하며 버티는 팀장 덕에, 팀원들은 새싹에서 나무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장이라면, 이 글을 읽고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성장을 믿고 기다려주고 있는가. (나 역시도 제대로 답을 못해, 부끄러워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