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by 리메


시간을 딱 맞춰 출발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뛰지 않으면 열차를 놓칠 것만 같아 손에 커다란 짐을 들고 엉거주춤한 폼으로 헐레벌떡 뛰어본다. 사실 이게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무슨 차이겠냐 싶지만 이렇게 뛰는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기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아슬아슬하게 딱 맞춰 열차 자리에 앉았다. 숨을 헐떡이고 있으니 열차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잘 탄 것인지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열차표를 꺼내어 화면에 나오는 열차번호를 확인한다.

‘아, 잘 탔구나.’

안심을 하며 자리를 좀 더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좌석의 테이블을 펼치고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낸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열차 밖의 장면이 한산하게 바뀌자 그제야 숨이 가라앉고 전날 밤 엄마와의 통화가 떠오른다.

엄마는 들뜬 목소리로 내가 있을 동안 먹을 음식들을 나열하며 계획을 읊어 주었는데 과연 그것이 이틀 동안 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인가 싶어 웃음이 났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먹어보겠노라 다짐하며 눈을 슬그머니 감는다.




“이번 역은 울산역입니다.”


금세 도착한 것 같다. 엄마가 마중을 나오기로 약속했으니 서둘러야겠다 싶어 열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에 탔는데 경사가 가팔라 불안하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꼭 붙잡고 다리를 단단히 세우고 선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나서 갑자기 멈춰도 절대 넘어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온몸에 힘을 주고 집중하고 있으니 어느새 1층에 다다랐다. 그런데 저 멀리 내 눈을 사로잡는 상점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미끈한 호리병처럼 생긴 병에 뽀얀 액체가 담겨있고 '복순도가'라고 적힌 라벨이 붙어있는 것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막걸리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근처에 양조장이 있다고 하던데 이것이구나! 순간 가족들이 떠오른다. 함께 나눠마실 요량으로 두병을 구매한 뒤 엄마차에 올라탄다. 우리는 반가움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나눈다. 가슴에 품은 막걸리 덕분인지 집으로 가는 길이 더 설레는 것 같다.





“아빠!”

“어 그래, 딸!”


아빠와 인사를 나누며 냉장고에 막걸리를 넣자 아빠가 그게 뭐냐고 묻는다. 이 지역에 양조장이 있는 막걸리인데 함께 마시려고 사 왔다 하니, 당신은 들어는 봤으나 아직 마셔보진 못했다며 눈을 크게 뜨고 눈썹이 한껏 올라간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꽤 기대가 되는 모양이다.

식탁 위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지고 나는 막걸리를 꺼내서 조심스레 잔에 따라 아빠에게 건넨다. 그리고 또 한잔은 엄마에게, 그리고 또 한잔은 내 앞에 놓는다.


“잘 먹겠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먼저 막걸리를 마셔본다.

입 안에 향긋한 산미와 적당한 탄산감이 감돈다. 보통의 막걸리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산뜻한 맛이다. 아빠는 맛이 특이하다며 이런 막걸리는 처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막걸리가 얼마 전 어떤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서 마시더라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는 웃으며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막걸리를 한잔 더 마셔본다. 취기가 적당히 오르고 우리의 식탁에 반가움과 웃음이 피어나며 밤은 깊어간다.

어른들은 그렇다. 늘 먹던 것, 마시던 것만 찾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엄두를 내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걸 알아서인지 새로운 것을 접하면 늘 부모님이 떠오른다. 그들의 얼굴에서 호기심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도 그 호기심을 유심히 들여다 봐주지 않는다. 그 호기심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딸인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들의 반복되는 세계에도 새로움이 필요함을 나는 안다. 그로써 그들은 한번 더 웃을 수 있고, 그 덕분에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한번 더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틀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배가 조금 빵빵해져 바지의 단추가 빡빡해졌지만 그만큼 나는 사랑을 받았으므로 오히려 부른 배가 더 좋다.

엄마가 울산역까지 배웅을 해준다. 엄마는 어쩐지 말이 없다. 나 또한 억지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우리는 섭섭한 마음을 굳이 티 내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자는 인사를 끝으로 웃으며 헤어진다. 길게 늘어진 택시들을 가로질러 울산역으로 들어가 열차표에 적힌 열차번호를 확인 후 타는 곳으로 올라간다. 시간이 조금 남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역 안 편의점 창문에 '복순도가'라고 적혀있는 종이가 붙어있다. 순간 친구들이 떠오른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두병을 꺼내 들고 계산을 하니 열차가 도착한다는 방송이 들린다. 서둘러 편의점에서 나와 승강장에 선다. 내 양손에는 커다란 짐 하나와 막걸리 두병이 쥐어져 있다. 그 손을 꼭 움켜쥐고 열차에 올라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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