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사람은 처음만 좋을까

나의 거울 12

by 신비

처음에는 다 잘해준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당연해서

우리는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당연했던 순간들이 전부 특별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던 사람,
내가 말할 때 휴대폰을 내려놓던 사람,
내가 웃지 않아도 먼저 분위기를 살려주던 사람.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그렇게 기억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안 것처럼.
판단은 대부분 그때 끝난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 느낌은 오히려 멀어진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짧아진다.
내가 말을 꺼내면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끊긴다.
예전에는 이어지던 말이 지금은 중간에서 멈춘다.


같은 말인데 온도가 다르다.


그때는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묻던 사람이
지금은 “그래서?”라고 말한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하다가 스스로 멈추게 된다.
괜히 더 말하면 내가 더 불편해질 것 같아서.

그때 처음을 떠올린다.
그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던 게 아니라
처음에는 저렇지 않았던 것뿐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보여준다.


말을 한 번 더 고르고 표정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상대를 한 번 더 신경 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습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기준이 내려온다.
노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필요가 사라진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관계가 유지된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자연스럽게 줄이기 시작한다.
말을 줄이고 표현을 줄이고 신경을 줄인다.


그리고 그 줄어든 만큼

관계의 온도도 같이 내려간다.


잘해주는 사람은 많다.
끝까지 잘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한 사람은 편해졌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변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같은 관계 안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진다.


왜 이렇게 변했어.


그 말은 비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확인이다.

처음의 너는 어디까지였고
지금의 너는 어디까지냐는 질문.


나 원래 이랬어.


그 말이 맞는 순간 제일 낯설어진다.
그 사람은 변하지 않았고
내가 다르게 보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알아버리는 순간.

그래서 더 헷갈린다.


처음이 진짜였을까?
지금이 진짜일까?

어쩌면 둘 다 진짜다.


처음은 노력이고 지금은 습관이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편해지면서 숨기지 않게 된다. 그래서 관계를 판단해야 하는 순간은
처음이 아니라 익숙해진 이후다.


시간이 지나도
말투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 사람
표정이 쉽게 거칠어지지 않는 사람
신경 쓰는 방식이 줄어들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끝까지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는 처음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잘해주는 순간보다
그게 얼마나 오래 가는지를 본다.


잘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걸 계속하는 게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그동안 계속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분위기를 맞추며 살아왔다.

불편한 순간이 와도 한 번 더 참고 한 번 더 넘겼다.
그게 관계라고 믿었고 그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번은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 의견을 꺼냈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넌 힘든 것도 잘 견디는 애잖아.


넌 상처도 잘 안 받잖아.


그리고 웃으면서 던진 말.


와, 급발진? 너 요즘 진짜 이상하다.


그 순간 생각이 멈췄다.
나는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왜 나는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래서 처음으로 이 질문이 남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나는 한 번도 괜찮다고 말한 적 없는데

왜 사람들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을까.

그래서 알게 됐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역할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역할을 오래 유지할수록
그건 성격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고
참는 사람이 되었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그래서 한 번이라도 다르게 행동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그게 가장 이상했다.


나는 변한 게 아니라 그동안 멈추고 있던 말을
꺼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걸 이상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이 말을 인정했다.


나는 로봇이 아니야.


나는 항상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괜찮은 척을 하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한다.


잘해주는 사람인지보다
내가 나로 있어도 괜찮은 사람인지
그걸 먼저 보려고 한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을 잃는 순간은

내가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 돌아왔을 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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