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우리는 말을 멈춘다

나의 거울 13

by 신비

어느 순간, 우리는 말을 멈춘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가족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굳이 고민하지 않고 꺼낼 수 있었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서로의 말이 끊기지 않았다.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관계는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말이 줄어든다.

하고 싶은 말은 그대로인데,

꺼내는 횟수가 줄어든다.



말을 아끼는 게 아니라 말을 접게 된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처음에는 “이건 말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이건 말 안 하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기준이 바뀌는 순간 관계의 방향도 같이 바뀐다.



회사에서는 일이 끝나고 나서야 할 말을 떠올리고
친구 앞에서는 웃으면서 넘기지만 집에 와서 생각이 길어지고 가족 앞에서는 괜히 말 꺼냈다가 분위기 이상해질까 봐 입을 닫게 된다.



그래서 관계는 유지되는데 대화는 줄어든다.
겉으로는 그대로인데 안에서는 점점 멀어진다.



왜 그럴까.



사람은 상처를 한 번 겪으면
다음부터는 말보다 계산이 먼저 나온다.



이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얘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까?

그렇게 감정보다 결과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말이 줄어든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이미 몇 번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해받지 못했던 순간을 기준으로
말의 양을 줄인다.



그게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설명조차 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설명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니까.



그래서 관계는 갑자기 멀어지는 게 아니라 말이 줄어들면서 천천히 식는다.



대화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의지가 사라진다.



이건 꽤 중요하다.



사람은 말을 줄이는 게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줄인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해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처음에는 더 잘해보려고 의견을 내고 더 나아지게 하려고 말을 보태지만 몇 번의 무시와 몇 번의 흘려듣기가 반복되면 사람은 조용해진다.



그건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

포기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친구 관계도 다르지 않다.
예전에는 서운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던 사이가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말해서 뭐 해.”라는 말로 바뀐다.



그때부터 관계는 유지되는 게 아니라 버티는 상태가 된다.


가족은 더 어렵다.
가까워서 말 못 하고 익숙해서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많이 참게 되고 그래서 가장 많이 쌓인다.


결국



말하지 않은 감정이 관계를 만든다.



이게 핵심이다.


사람은 말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말하지 못한 것들로 관계의 방향이 결정된다.

그래서 어떤 관계는 싸우고도 더 가까워지고
어떤 관계는 조용한데도 멀어진다.


차이는 하나다.



말했느냐.
참았느냐.



여기서부터 관계는 갈린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꺼낼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인지.


내가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관계인지

아니면 계속 조심해야 하는 관계인지.


그걸 먼저 보려고 한다.



관계는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지로 결정된다.


그리고 사람은 말이 많아서 편한 게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긴장이 없을 때 편하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조용해진 관계는 편해진 게 아니라 이미 멀어진 상태라는 걸.



그리고



관계가 멀어지는 건
대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면



나는 조용해진 게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더 이상 말할 이유를 잃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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