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카데미 교수님의 전시를 보러 춘천문화예술재단에 다녀왔다. 개관전이었기 때문에 전시장은 곧 있을 오프닝을 보기 위해 모인 관람객들로 가득 찼었다. 그중 대부분은 사진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듯, 하나씩 각자의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 공간에서는 나 스스로가 가장 이방인으로 느껴졌다. 그들과 다름없이 카메라를 목에 건 나도, 그들의 눈에는 같은 세계의 사람으로 보였으려나.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가장 오랫동안 멈춰 서서 관람했던 김녕만 작가님의 작품들이다. 특히 작품 소개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사진을 보며 문득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떠올랐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이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라고 시인은 노래했다. 시인의 마음이 되어 나도 묻는다.
“이 사진들은, 이 순간들은, 어떻게 나에게로 왔는가.“
한 줄기 햇살처럼 한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또는 간절한 기도처럼 나에게로 와 멈춘 시간들, 그 순간들의 무수한 표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숱한 얼룩과 흔적들이 남는다. 너무나 소소하고 사소한 순간이어서 정작 본인에게는 기억조차 없을 그 순간들이 사진으로 남게 되면 세월과 함께 이야기는 스스로 증식되고 확장되어 시대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어느새 50살이 되어가는 사진도 있다. 사진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연륜이 더해가고 완숙된다는 것을, 그 사진을 찍을 당시엔 몰랐다. 스치면서 나에게 스며들어 나를 반응하게 만든 순간들을 지금 생각하니 내 사진에 들어있는 인물이나 사물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나의 시간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 아니라 실은 50년 전의 나, 30년 전의 내가 투영된 나의 내면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쓸고 지나가버리는 시간 앞에서 살아남은 과거의 편린을 바라본다. 이들 가운데 더러는 행복하고 더러는 슬프고 또한 쓸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꽃인 듯 눈물인 듯 달고 쓴 인생의 한 순간이 사진으로 남아 우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에너지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녕만 작가님
2.
‘가족끼리 모여 먹은 핼러윈 캔디가 나중에 당뇨병의 원인이 될지, 가족과 보낸 즐거운 시간이 면역력을 높여줄지 알 수 없다. 삶이 그렇다. 언제가 됐든 몸이 아프기 시작할 것이다. 나쁜 일을 방지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나뿐 일은 생기겠지만 그래도 삶의 구석구석을 만끽해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그렇게 살았을 삶을 사는 게 목적이니까.’
그러니 우리 삶의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살아가자.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자. 사랑한다고 아낌없이 표현하자.
3.
대만의 겨울은 습했다. 날씨가 너무 험상궂어 일기예보가 무의미했다. 한 시간마다 비가 오고, 한 시간마다 구름이 갠다. 그곳의 겨울은 초등학생 시절 가을에 떠난 수학여행이 떠오르는 계절이었다.
요 며칠 맑은 날씨었으나 요 근래 봄비가 내려 대만의 날씨가 떠오르기도 한다.
기분이 가라앉기도 하고, 나의 미운 부분이 자꾸 생각나서 사랑받을 자격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고 싶고, 이루지 못할 일들을 이뤄내고 싶다. 확률을 계산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다. 이런 나의 소망들은 더욱더 커지고, 많아지고, 깊어진다.
창 밖에는 이른 아침까지 내리는 맑은 빗물에 꽃잎들이 떨어져 위태롭게 흐르고 있다. 나아질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토록 불안하지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난날 새긴 활자에 투영된 나의 내면들을 돌아보며, 변화를 직감한다.
/20230411
4.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본인의 인생이 많이 달라진다 독기에다 밀어 넣느냐 아니면 그 사람을 증오하는 감정에 밀어 넣느냐는 한 끗 차이. 상대방을 증오한다고 해서 내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디에서 본 글이 있다. 꾸준히 사람을 만나고 깨져봐야 그제서 내가 했던 생각들이 피해의식이 망상이었도 상대에게 실례였단 것을 깨닫는다고. 건강한 사고는 혼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5.
아침에 일어나 30분간은 자기 방어기제가 발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뒤로 갖게 된 나의 아침 루틴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30분 동안 나는 흘려보내야 할 생각들은 흘려보내고,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은 활자로 써내 무게를 더해 잡아놓는다.
작년과 지금 나의 삶과 태도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감히 지금의 나를 예측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작년에는 나의 내면에 변화가 찾아왔다면, 올해는 특히 날 감싸고 있는 환경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 속도는 한 달, 일주일, 사실 하루 만에 성큼성큼 나를 앞서나가기도 해서 가끔 따라잡기 벅차기도 하고 따라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그렇다. 그러면서 발목이 삐끗하기도 하고, 무릎에 상처가 나기도 하고. 너무 아프고 황당해서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아무 일 없듯 재빠르게 일어나서 마저 달려 나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감내해야 하는 것인걸.
침묵보다 아름답지 못한 문장들은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채 꾹 삼켜진다. 가슴속으로 묻힌다.
그 많은 변화들에 내가 나다움을 유지하면 되는 것 아닐까. 재작년의 나, 작년의 나, 반년 전의 내가 지금 상태 속에 놓였다면 과연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을까.
하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성장하고 넓어져서 감당할 수 있는 부분들도 커지기 때문에, 매년마다 내게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이 더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내가 아파하지 않도록 의연하게 대처하고 흘려보낼 수 있는지, 삶의 지혜가 점점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230413
6.
또 어김없이 찾아온 수요일도 역시 많은 것들로 가득 채웠다. 가고 싶었던 카페에 앉아서 밀린 일기들을 쓴다. 지난 일들을 곱씹으면서 그 당시와 현재를 비교하며 변화한 부분들을 알아낸다.
내가 앉아있던 카페는, 언젠가 내가 카페를 차리게 된다면 이런 공간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내 취향과 유사한 공간이었다. 수고롭게 계속 뒤집어줘야 하는 엘피. 벽 한편에 수없이 빼곡히 가득 진열된 직접 수집된 것들로 보이는 음반들. 거기에 쌓인 먼지냄새. 목재로 된 벽과 가구들. 갓 구운 빵 향과, 원두를 가는 소리. 그곳에서 그려지지 않은 내 취향의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7.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지품들이 놓인,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를 돌아보는 걸 좋아한다.
얼마 전 무인양품에서 새로 구매한 일기장.
일기를 쓸 수 있는 펜들과 일본에서 사 온 편지지가 들어간 키티버니포니 필통.
아이패드 파우치, 그리고 가방에 달린 키링도. 들고 다니는 모든 패브릭은 키티버니포니다.
내부가 커서 물건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늘 어깨가 빠질 만큼 무겁게 들고 다니는 에핑 글러의 보부백
나의 분신과 같은 소니 a6400
너무 무겁지만, 이 중 하나도 빼놓고 다닐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다.
8.
어제는 봄비 때문에 다 떨어진 꽃잎에 마음이 아려 밤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청운동은 푸른 녹색으로 물들었다.
울창한 푸른색이 아니라, 이제 막 난지 얼마 안 된 여린 잎이 띄고 있는 연둣빛의 녹색 말이다.
벚꽃이 떨어지면 봄이 진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4월이었고 봄이었다.
밀린 일기를 옮겨 적었다. 열두 장이었다.
꾸준히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나의 기록행위는 그 자체로도 위로가 된다. 누구한테 응원과 격려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이 있다.
/20230412
삶을 유연히 지속하는 비법이 갑작스러운 성공도, 시련을 거듭해 얻은 통찰력도, 많은 주변인의 지지도 아니라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건 꾸준한 자기다움이라. 거듭한 오르막과 내리막길 사이에서 흔들릴 수 있으나, 그 언제나 그랬듯 자기다움을 지킬 수 있는 의지. 나를 잠시 벗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로서 돌아올 수 있고 들어올 수 있는 자기 의지. 어지러운 삶의 연속성 안에서 나의 방향을 언제나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 나를 잠시 버리다가도 귀소본능이 있는 것처럼, 내 안으로 나를 감싸 안는 것. 내가 나를 잃어버리면 그 어느 성공도 시간도 인연도 소용없는 거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면, 손에 쥔 많은 소중한 것들이 제 것이 아니 거라. 결국은 쓸모없는 허울을 쫓기 위한 노력과 보상일 것이다. 나 자신이 내가 아닐 때만큼 초라해지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 삶이라는 거라. 가끔 뒤처지더라도 반드시,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꾸준한 자기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