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미친 듯이 매진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오랜 세월을 하나의 것에 몸 바친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게 무형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소 무례하거나 거친 게 좋다는 게 아니다. '절박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가 나를 설레게 한다. 나, 이거 아니면 할 거 없거든? 하며 계속 글을 쓰고, 기타 줄을 튕기고, 붓칠 하는 사람들의 모습. 마침내 끝없는 몰입에 성공해, 그게 삶이 된 이들.
언젠가 나의 시 선생님, 박연준 시인이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모든 생활이 시로 수렴되는 삶을 살아야 해. 생활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시로 생각하고 시 위에서 고민하고 시에서 출발하고 시로 돌아오는, 시 중심주의 인간이 되어야 해."
그걸 정말로 해낸 이들을 볼 때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안도한다. 내 안에 난 구멍.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구멍을 들락거리느라, 이외의 생활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모습이 별스러운 게 아님을 확인받은 것 같아서. 그러니 내게 남은 건 '증명'이다. 시란, 쓰는 시간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언제나 흐르는 노래라는 걸. 차차 보여주면 된다. 생애에 걸쳐.
- Kim Haeseo, hep magazine #04
1.
꽤나 ’ 덥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직 4월 중순인데 벌써부터 덥다는 느낌이 들면, 앞으로 다가올 여름은 또 얼마나 길까. 겨울이 지나서 그런 걸까, 사계 중 여름이 가장 긴 계절 같다. 그 긴 나날동안 우리는 초록에 둘러싸여 생을 보낸다.
2.
요즘은 기록을 매개로 한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기록이라는 습관을 갖고 살아가는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 소비하는 것보다는 내 속에 들어오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좋았다. 어떤 날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하다.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실수를 한 게 있으면 어떡하지 싶기도 하고.
기록을 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일상의 망각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있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들면 메모장을 켜서 적어둔다.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는 나의 생각들은, 시간 지나고 난 뒤의 내가 느끼지 못할 생각들이니까. 이 생각은 작년 나를 꾸준히 괴롭혔던 강박관념이 됐기도 하다.
요즘 적는 일기들에는 대부분 비슷한 의미가 담겨있다. 현재의 어떤 고민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무슨 답을 찾아가고 싶은지. 지금의 내가 남긴 기록들이 언젠가 미래의 나에게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으려나. 아니면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를 추억하며, 참으로 불완전했지만 사랑스럽다고 여길 수 있으려나. 모든 것은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지만, 그래도 그 순간순간의 불안정함 속에서도 꿋꿋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랑하게. 올곧게 살아가고 싶다.
3.
언제는 또 ‘이해’에 대해 생각을 했던 때가 있다. 대상으로 살아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대상을 향한 애가 있었기에, 나도 대상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타인을 이해하려면 그럴 체력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여유롭지 않다면 비틀린 책임감으로 상대를 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또는 무언가에 충실하려면, 우선 나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면, 내가 먼저 나를 다그치고 사랑해야 한다.
하강이 상승이 되고, 비움이 채움이 되며,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다면 분명히 얻음이 존재한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나. 누구에게 사랑을 주고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나. 상처 얻은 경험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었나. 그 수많은 생각의 끝에 존재하는 나는 어떻게 귀결되는가.
앞으로도 꾸준히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며 살아갈 듯하다. 사랑하고, 상처받고, 아물면서 내가 너무나도 넓어지는 것을 알기에. 잘 이겨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떤 계기로 글보다는 삶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일을 겪고 나니 이상하게 모순처럼. 다시 쓸 온도를 되찾아가게 되었다. 새삼스레 깨달은 것은 우리의 일상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 결코 꺼져서는 안 될 촛불이라는 점이었다. 무언가를 하나둘 깨달을 때마다 그제야 비로소 잠깐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숨통이 트였다. 평생을 고개를 묻은 채 산다고 해도, 잠깐이라도 고개를 들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행복하다. 나의 무지를 깨닫는 일. 부디 조금 더 나은 글을 쓰는 일. 그것만으로도.
4.
지난겨울의 나는 늘 고민의 날들이었다. 날은 추웠고, 사진에 대한 압박감으로 늘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일주일간 허송세월하고 과제를 미루다가 당일에 빠르게 촬영해 과제를 제출하기도 하고. 매주 과제 크리틱을 하며 느낀 것은, 전부 나보다 과제에 많이 몰두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한때는 ND필터랑 1 stop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도 떨어져 머릿속에 꾸준히 집어넣으려 했다.
그렇게 나의 풋내기 인생은 어렴풋이 사진을 배우고 난 뒤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달라지게 된다. 오토모드로 찍던 나는 수동으로 모드로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ISO를 조정한다.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인지도, 셔터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고민한다. 매일매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끊임없이 사진에 대해 몰입한다. 결국, 스무 살의 내가 스물한 살이던 언니에게 품었던 동경심이 날 여기로 데려다 놓았다. 정말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삶이란 이토록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구나. 이 또한 나의 숙명이리라. 어떤 형태의 기록이든,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나의 가치를 생산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