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서 엄마를 기다렸던 저는 세상이 콩알만 하게 여겨졌어요. 지구는 둥글어서 앞으로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다는 노래는 아직도 따라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읽었을 때는 ‘개선문 어디쯤인가 중국이 있다고 믿고서 중국에 데려다 달라고 떼를 썼다는 등장인물의 묘사에 고개를 끄덕였지요.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 유년을 보내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해진답니다. 유행을 좇지도 않고, 친구가 없이 등하교를 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아요. 그것은 뭐랄까, 자발적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무심해지면 상처 받지 않는다는 걸 안 셈이라고 할까요.
그런 무심한 심상에도 아주 미세하지만 마음을 끄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꽤 힘들어했었는데 정리해보면 유리조각 같은 가난이었어요.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박혀있는 가난. 타인과 다르고 싶지 않고, 튀고 싶지 않고 그냥 무심한 채로 나인 채로 살기를 방해하여 늘 설명을 필요로 하고 이유를 대야 하는 가난 말입니다.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서 무심함을 배움으로써 상처 받지 않으려 했던 제가 그네에서 내려와 세상을 걷다 보면 콩알만 했던 세상이 점점 커지면서 이번에는 그네의 아이인 제가 콩알만 해지는 겁니다. 이번에도 저는 어떤 방안을 궁리해냅니다. 그것을 저는 ‘자발적인 가난’이라 이름 붙이고 나름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손자와 둘이 살게 되기 전까지 저는 이 자발적인 가난을 거의 성취했다고 믿었습니다. 자랑에 가까운 가난한 환경을 도스또예프스끼적으로 즐기기까지 했으니까요. 이야기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도스또예프스끼의 가난한 연인들을 읽었을 때는 정말 분노했어요? 사랑을 한다며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다니요. 가난하니까 더 사랑해야지라고 말이지요. 어디까지나 머릿속으로만 세상을 살던 때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초등학생 시절 하나, 중학생 시절에 하나, 고등학교 시절에 하나 둘 셋 넷... 가난해서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니까 재수없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제 친구가 가난해서 울었지요. 매일매일 노란 무를 반찬으로 싸오는 친구와 매번 도시락을 함께 먹었는데 삼삼오오로 도시락을 먹던 친구들이 제 이름만 부를 때, 같이 먹자고 권할 때, 뭐라고 할까요. 매번 오기 같은 것이 생겨서 이상한 기분으로 밥을 먹었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발을 저는 친구가 있었어요. 친구의 한쪽 발은 다른 쪽 발보다 엄지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작았는데 공교롭게도 새 실내화를 사 신고 온 날에 같은 반 부반장도 새 실내화를 사 신고 와서 잃어버렸다고 우는 겁니다. 교실 안은 술렁였고 새 실내화를 신고 온 친구는 분위기 상 도둑으로 몰리는 상황을 다 보고 있기에는 교실이 너무 좁고 답답하고 슬펐어요. 분명히 교실에서 아침인사를 했을 때 친구의 새 실내화를 보았는데, 다음 장면은 부반장이 울고 있고, 그리고 마지막엔 친구가 도둑으로 몰려 울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아직도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 교실에는 어른은 없고 아이들만 있는 세상 같았어요. 아니 어른이 있어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간단하지 않은 문제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아..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니 가슴이 더 조여듭니다. 저는.. 친구가 노트에 써넣은 엄마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말았어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하숙을 치며 여러 형제들을 키우는 엄마를 위로하는 딸의 편지 마지막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지요. 여행은 나중에 많이 가도 되니까 이번 수학여행은 가지 않겠다고요. 저는 지금도 그 친구의 옆모습을 기억합니다. 코끝이 얼마나 얌전하게 올라가 있는지 몰라요. 저는 아직까지 그렇게 예쁜 코와 둥근 이마와 사랑스러운 보조개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답니다. 그런 그 친구의 편지는 또 얼마나 훌륭했는지 몰라요. 다음은 원하던 대학, 원하던 학과에 붙은 날, 술을 못 드시던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서 대학에 보낼 수 없는 속사정을 울면서 설명하셨던 다음 날 아침 친구가 복도에 서서 들려준 일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학에 가야 하는데 저는 집을 나와서 가고 싶은 대학에 가라는 말도, 돈을 벌어서 나중에 가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함께 슬퍼만 했습니다. 그냥 슬퍼만 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제가 이 밤에 깨어서 가난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는 것은 자신의 가난이 자발적인 가난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의식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요. 저는 손자와 함께 살기 전까지 자랑이라고는 전기요금이 오천 원을 넘지 않는 것만이 자랑이었답니다. 청소기? 청소기는 없어요. 그냥 걸레질을 하지요. 세탁기? 세탁기도 없어요. 손빨래를 하고 이불 빨래는 가끔 이모 댁에 가지고 가서 돌려요. 티브이? 티브이도 두 번인가 얻었고, 두 번 다 내다 버렸어요. 전기밥통? 밥도 압력밥솥에 해서 냉동실에 저장해두었다가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지요.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컴퓨터 한 대와 노트북, 냉장고, 선풍기와 전기장판이 계절별로 등장을 달리합니다.
저의 궁상스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세탁기를 사주겠다, 티브이를 주겠다는 친구는 멀어져 갔습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저의 생활방식을 존중해주는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했으니까.
손자는 잠들어 있습니다. 선풍기 대신 그 자리에 에어컨이 돌아가고, 책을 읽던 베란다 한쪽에는 세탁기를 들였습니다. 저의 자랑이었던 전기요금은 더 이상 오천 원의 벽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지요. 자발적인 가난이 주었던 소비와 습관에 균열이 오자 혼란스러웠으나 그것도 잠시일 뿐 다시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저는 늘 노란 무만 도시락 반찬으로 싸왔던 친구, 가난했기 때문에 새 실내화를 신은 날 도둑으로 몰린 친구, 대학에 붙어도 갈 수 없었던 친구를 잊지 않을 겁니다. 그 체험이 바로 삶의 나침반이 되었고, 그 나침반이 있었기에 길을 벗어나도 길을 잃지 않고 되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자의 손에도 언젠가는 삶의 나침반이 들려있을 걸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