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어

by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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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에서 만화책을 보며 낄낄대는 너에게 포도 한 송이 씻어서 접시에 가져다주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어.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네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면 신나게 장단을 맞추어주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어. 저녁에 부엌문을 열고 길고양이에게 남은 밥을 나누어주면서 네가 무엇이 먹고 싶은지 알고 싶은 엄마. 잠자리에서 각자 책을 읽다가 네가 잠들면 일어나 불을 꺼주고 나오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어.


2.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일기장을 베끼는 일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유산대신 일기장을 남겼고, 유언장 비슷한 편지에는 자신의 일기를 읽어주길 바랐다. 솔직히 나는 엄마의 일기장을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었다. 지루했고, 아픈 상처와 만나는 일이 싫었다.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3.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 반복듣기는 마치 주술처럼 글쓰기의 욕구를 부추긴다. 회상.

"나는 너희들이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각자 행복할 때, 가장 행복할 때 이 아이가 생각났으면 좋겠어. 이 아이가 생각나서 그만 웃음을 멈추었으면 좋겠어."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어떻게 누르면 무념무상인 순간 불시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지 모르겠다.


4.

설거지를 하면서 1번과 2번과 3번 문장이 불시에 찾아와서 당황했다. 손자는 방에서 뽀로로를 보면서 웃고 있고, 나는 지금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듣고 있다. 오직 그 두 가지 상황만 주어졌는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는 글쓰기가 신체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가슴은 종이, 감정은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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