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노트 활짝 펴서 맨 위 우측은 가로 쓰기로 아야어여를 끝까지 써주고 좌측은 세로 쓰기로 기역니은을 쭉 써주면 정명이가 알아서 ㄱ + ㅏ= 가 이런 식으로 가나다라 써올 거야. 중간에 참견하지 말고 너는 설거지하고 있거나 요리하고 있다가 다했다고 하면 쭉 소리 내어서 함께 읽어보고 틀린 건 빨간펜으로 써주고 끝~ 칭찬 듬뿍, 감탄사 듬뿍, 뽀뽀 듬뿍, 그리고 안아주면 좋겠지.
고모는 하기 싫다고 하면 심심할 때까지 내버려 뒀다가 그럼 가나다라 한번 쓰고 할머니께 사진 찍어서 자랑하는 게 어때? 정명이가 내년에 학교 들어가려고 한글 공부했어요 하고 제안하면 하더라.. 그러니 오늘은 준비물만 갖고 가고 다음 주에 해도 괜찮아.. 할머니 보고 싶었다고 하니 실컷 할머니랑 대화하게 하고 너는 정명이 먹을 저녁 맛있게 준비하렴.
할머니께서 중고가게에서 얻어 온 푸른 접시 있지? made in japan이니 찾아서 쓰고. 왜 이 시대에 재팬 걸 쓰냐고.. 음.. 아시아의 국가들은 사이가 좀 좋아졌으면 좋겠어.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하는 동안 주변 국가들은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렸지. 지난 과거를 모를 일본이 아닐 거야. 어쩌면 독일식 사죄는 서양식 사죄이고 일본식 사죄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부족해. 여러모로 부족한 사안들이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지성들이 부끄러워하고 지성의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 하는데 내부의 목소리만으로는 국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지. 그들 지성과 한국인들이 사이좋게 민간 외교로 풀어가면 일본은 국가차원에서 방향을 바꿀 거라고 생각해. 정명이 한글 쓰기 연습에서 일제 접시 이야기까지, 일제 접시에서 한일관계로까지 이야기가 너무 확대된 것 같구나. 그저 고모 생각을 말했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