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와 도토리

by 이은주

개천절, 하루를 헤어져있던 단짝 뮤즈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하는 인사에는 리듬이 있다.
안. 녕하세요~
그럼 단짝 뮤즈가 불 꺼진 방에서 나오시며 이렇게 받으신다.
어. 서세요 오~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에서 구찌뽕(추석에 자녀분이 사 오신)을 컵에 따라드리며 계획 세우기에 들어간다.
오늘은 뭐부터 할까요?
무 있어. 무나물
커다란 무가 베란다에 있다. 공공근로에 다니시는 제우스(나는 할머니는 뮤즈, 할아버지를 제우스로 부른다)가 무를 사 오셨나 보다.
우리는 커다란 무를 향해 부엌에 서서 부위별 고기 자르 듯이 푸른 부분은 그냥 먹고 이등분 한 한쪽은 무나물을 하고 나머지는 야채 박스에 저장해두기로 했다.
단짝 뮤즈와 제우스의 살림은 소박하고 단정하다. 국그릇 두 개, 밥그릇 두 개, 접시가 대중소로 하나씩, 오목한 반찬 접시 3개.
러시아의 민화 '칼라 보크'에서 나오는 노부부처럼 빠듯한 삶이지만 닮고 싶을 정도로 알뜰하다.
9월부터 조금씩 성당 판유리처럼 방바닥을 점령하고 있는 도토리는 또 어떤가. 76세의 몸으로 공공근로에 나가 생활비는 벌어오시는 제우스는 일터에 떨어진 도토리를 바지 주머니 한가득 주워오신다고 한다. 언젠가는 뮤즈의 밥상에 도토리묵이 오를 것이다. 냉동실에는 작년 겨울 말려둔 무말랭이가 비닐봉지 한가득 들어 있다. 티브이 앞 수첩에는 포캣 북 동의보감에서 옮겨 적은 칡의 효능, 버섯의 효능 등이 적혀있다. 모두'아널드 키아리 증후군과 동반된 척수 공동증'을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한 것이다.

뮤즈가 껍질을 두껍게 깎아내 버리고 한입 베어 물면 물이 배어 나오는 무를 마비된 손바닥에 올린 채 달게 드시고 있는 동안 나는 무채를 썬다. 마늘을 다진다. 파를 총총 썬다.
그저께는 시들어가는 호박으로 호박전을 부치며 이런 말을 나누었다.
구수한 튀김 냄새나는 것만으로도 살림하는 집 같지요.
응 그래..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카레를 만들면서 남겨둔 소고기 한 줌을 마늘과 볶다가 무채를 넣고 나무 수저로 뒤적이던 내가 묻는다.

어제는 뭐하셨어요?
영감은 도토리 하고 나는 놀고..
방바닥에 신경이 없는 손으로 무언가 낙서 비슷한 것을 하시며 답하시는 모습이 아이 같다.
물기 있는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으며 방안을 뒤덮은 앙증맞은 도토리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사진 속에는 없으나 도토리 사진에는 노부부의 방안 풍경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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