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엄마가 지금 공덕역 7번 출구로 갈게요. 시간은 밤 9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자는 언어 수업과 인지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와서 씻고 내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막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나의 직관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벌써 출발하셨을지도 모른다로 결론을 얻는다. 손자에게 다시 옷을 입히고 역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기분이 좋았다. 밤이니까 내일 만나자고 했더니 벌써 버스 안이라고 하셨던 엄마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밤에 왜 돈이 필요한지 물었다. 그랬더니 아니, 당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책이 나와서 사람들 만나면 아무래도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셨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혹시 정부에서 주는 노인연금을? 일단 주신 돈을 감사히 받았다. 앞으로 펼쳐질 파노라마 같은 일들에 돈은 필요하다. 엄마의 일상을 그림자처럼 따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 엄마는 얼굴 봤으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손자의 손을 잡고 올 때 연습해 둔 대사를 손자에게 시켰다. 엄마는 청각장애이므로 입술을 읽지 못하게 손자의 귀 쪽으로 얼굴을 돌려 말했다. 할머니 치킨 먹고 싶어요 해. 할머니 치킨 먹고 싶어요~ 엄마는 딸의 말은 안 들으셔도 증손자의 말에는 약하시다. 엄마는 어제도 양손 마비 뮤즈를 돌보는데 전화를 하셨다. 월드컵경기장인데 잠깐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양손 마비 뮤즈의 돌봄이 끝나고 여든일곱의 뮤즈에게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전화 속 엄마에게 지금 가겠다고 하니 등 뒤의 뮤즈가 그럼 여든일곱 할머니는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신다. 전화해서 엄마가 길을 잃어서 찾으러 갔다 오니까 1시간 늦는다고 해야지요. 저희 엄마가 요즘 이상해요. 가봐야 해요. 뮤즈가 알았다는 듯이 끄덕이신다. 그래서 성큼성큼 앞치마를 휘날리며 엄마가 있다는 곳으로 갔더니 계단참에서 신문을 읽고 계신다. 반갑게 맞으시고 대박 세일을 알리는 천막으로 이끄신다. 옷을 사주시겠단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고 하니 그럼 다시 가라 신다. 아아 나는.. 엄마. 차가워진다. 등을 돌린다. 엄마에게 할 말이 많다. 엄마, 내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 그래도 다시 되돌아선다. 그렇게 엄마와 헤어졌었다.
밤 10시에 딸에게 돈을 주고 다시 돌아서려는 엄마를 못 가게 붙잡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망원 7길 2 다시 4지요? 예. 지금 어디 계세요. 저희 지금 외출 중인데 누구세요? 119인데요. 댁에 불이 나서 창문을 뜯었어요. 오시는데 얼마나 걸리지요? 아아 나는 다리가 풀리고 있었다. 곁에서 엄마는 당황한 기색으로 지팡이를 휘두르고 계셨다. 지팡이. 며칠 전 본 그 지팡이 대신 엄마 손에는 쇠 박대기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우린 택시를 타고 달렸다. 손자와 함께 산 이후로는 대부분 저녁 약속이 없던 터라 오래간만에 달리는 강변북로였다. 한강에 던져진 빌딩의 불빛이 동글동글 빛났다. 밤물결에 퍼지는 빛들은 길었다 짧았다 펴졌다 오므라들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 드라이브하니까 좋다 그지? 엄마는 속상하실 거다. 자신이 김치찌개를 올려 둔 냄비 불을 끄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불이 나서 겁이 나셨을 거다. 정녕 내가.. 함부로 치매라고 부르지 마라. 치매라는 이름의 두려움에 점점 숨어버리면 치료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 뇌 영양제, 이젠 강조하지 않으셔도 당신이 드실 차례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엄마. 아침에 엄마의 식탁에 올릴 포도를 닦는다고 베이킹파우더 위에 식초인 줄 알고 올리브 오일을 듬뿍 뿌려서 포도알이 반질반질 해져서 탱글탱글 맛있어 보이니까. 우리 그렇게 어울리자고. 화내지 말고 코믹 버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