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쿄 3부작

우체국아줌마 이야기 9

새벽 산책에서 얻은 영화이야기

by 이은주

서예 학원을 발견한 오치아이에서 또 하나의 발견을 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집앞 산책을 나온 친칠라 골든이 풀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자석처럼 끌려갔던 날입니다. 강아지처럼 생긴 고양이가, 그것도 풀을 먹고 있는 걸 처음 보자마자 전 그 자리에서 멈추어버렸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정말 재미있는 동물을 만난 거예요.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고양이 주인이 고양이 이름을 부르자 이상하게 생긴 고양이가 제 앞을 휙 지나가 들어가 버립니다. 저는 아쉬워하면서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오치아이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던 저에게 작은 에피소드가 생긴 순간 사라져버린 거지요. 그때 골목길에 버려진 책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헌책을 사서 모으던 때니까 과월호 잡지라면 몇 권 골라가질 셈으로 살펴보니 파란색 파일 두 개에 한국의 1970년대 영화관에서 팔던 상영 영화 팸플릿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게 아닙니까. 서부영화에서부터 007 시리즈, 더스틴 호프만의 빠삐용,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추억, 사운드 오브 뮤직. 누가 이렇게 귀한 것을 버렸을까? 저는 주변을 둘러봅니다. 파란색 파일이 버려진 곳 담벼락을 봅니다. 누군가 이 세상 사람이 떠나자 그의 자손들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영화 팸플릿 모으던 취미에 싫증이 나서 버린 걸까? 그렇다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가지고 가야지.
저는 산책을 중단하고 두 개의 파일 곁에 있던 채 정리되지 않은 영화 팸플릿까지 모두 그러모아 양손에 들고 비틀비틀 집까지 돌아옵니다. 삐걱대는 대문을 밀고 들어와 가파른 철계단을 오른 다음 4 조반의 제 방에 산책 중 발견한 보물을 풀어놓자 영화이야기로 가득 찹니다. 커튼으로 옷을 만들거나 설원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어우러져 노래하고, 권총을 든 젊은 숀 코너리와 미녀가 있고, 쓸쓸한 바닷가에서 젊은 연인이 어깨동무를 하고 걷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자란 세대이기는 하지만, 안정효 선생의『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에 나오는 진정한 할리우드 키드 세대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억지를 부린다면 다음다음 세대에 속할지도 모르겠군요. 책에서는 말합니다. ‘돈만 몇 푼 있으면 우리들은 이렇게 시대와 나라를 마음대로 선택해서 80분이나 90분, 때로는 두 시간씩이라도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찾아가는 권리가 주어졌던 것이다. 우리들이 생활로서 더불어 살아야 했던 현실이 극장 밖에서 따로 버티고 있기는 해도 우리들은 극장 안에서는 얼마든지 행복할 권리가 있었다.’고.
저는 주말의 명화극장을 한 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꼬마였으니까요. 졸린 눈을 비비며 본 것도 같은데 일어나 보면 늘 일요일 아침이었던 기억. 「왕과 나」 같은 영화는 늘 놓친 부분에서 또 못 보고 끊어지던 우연. 밤이든 낮에 방영되든 늘 같은 부분이 누락되어서 이상하다 어떤 내가 알지 못하는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속상해하던 그런 시절에는 주말의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평론가의 독특한 해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 와서도 그와 비슷한 존재감을 가진 영화평론가 할아버지를 tv에서 보고는 어린 시절의 명화극장이 더욱더 그리워지기도 했었지요.
영화 팸플릿의 주인공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으로 보았던 것일까요? 상영 영화 팸플릿 위에 연도가 적혀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제가 태어나기 2년 전에 보았더군요. 그러니까 저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잉크와 활자와 종이를 넘기고 쓰다듬고 먼지를 털어냈던 그날 이후 영화를 대하는 저의 태도가 조금 정중해진 느낌입니다. 영화는 그냥 영화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잊히지 않는 청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그런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질문해 봅니다. 우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린 영화를 꼽으라면 저는 『길』과 『추억』과 『닥터 지바고』 그리고 『400번의 구타와』와 『정복자 펠레』를 꼽겠어요. 일주일 내내 같은 영화를 본 걸 꼽으라면 대한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아라비아의 로렌스』였어요. 귀국 후였지요. 경기가 안 좋았어요. 구직활동을 하던 때인데 왜 그렇게 사막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모르겠네요.

매거진의 이전글우체국아줌마 이야기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