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이은주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은하철도의 밤'은 내 졸업논문 주제였다.
주인공 조반니의 고독에 대하여 어떻게 400자 원고지 50장을 채울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소복이 눈 내리는 겨울밤 24시간 영업을 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원고지 50장을 채우기 급급했던 나는 졸업 이후 미야자와 겐지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생활이라는 세계로 항해를 계속했다. 죽음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이상 세계는 모두 원고지에 묻고 오직 생활에 따른 노동만이 하루를 채우고 있었다. 한때는 노동에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기조차 했다.

나는 한동안 어린이들을 만나는 생활을 했다.
그들에게서 해님달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잊었던 동화를, 조반니의 고독을, 그리고 먼 세계에 대한 동경을, 아픔을, 가난을 기억하게 되었다.
일본어 수업 5주 차. 5학년 교실은 24명의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다.
지난주에 배웠던 간단한 자기소개와 일본어의 구성을 복습한 후 아이들에게 히라가나 읽기를 지도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채 카메라로 한 아이만을 클로즈업시킨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소년은 5주 내내 소극적이고 부끄럼을 몹시 탔다. 내가 질문을 해도 목소리만 겨우 낼 듯 말 듯 했다. 그런 소년이 히라가나 읽기 시간에 보여준 표정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년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히라가나를 읽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미소로 아이우에오, 가기구게고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당뇨가 500이 넘어서 입원을 하셔야 하는 엄마를 집에 남겨두고 수업을 하던 나는 한차례 울고 나온 길이었다. 몸도 마음도, 통장도 다 지쳐있던 나였다. 어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굴뚝같았던 나는 소년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행복한 기운을 느끼며 40분의 수업을 마쳤다.
수업이 끝나고 다음 주 수업계획서를 쓰기 위해 방과 후 사무실에 갔던 나는 선생님께 소년의 이름을 물었다.
'아, 지훈이요. 지훈이는 엄마가 일본에 계셔서 그런가 보네요. 안마사로 일본에 가신지 3년 되셨대요. 평소에 엄마 이야기를 자주 하거든요.'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드라마가 있다.
3년 동안 엄마를 만나지 못했던 소년은 엄마가 사는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동안 잠시 엄마와 만나고 왔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소년은 히라가나의 아이우에오를 따라 읽는 내내 얼마나 행복한 얼굴이었는지 모른다. 주변의 공기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까지 소년의 환한 미소가 번지는 듯한 체험을 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 나는 레일은 없지만 기차 방구석에 앉아 '미야자와 겐지의 힘'이라는 일본 도서의 기획서를 쓰고 있다. 어두운 방에서 양쪽으로 불을 밝히고 미야자와 겐지의 전기문을 읽는다. 400자 원고지 50장은 간신히 메워서 졸업은 했지만, 어쩐지 자신 있게 썼다고 말할 수 없었던 졸업논문 '은하철도의 밤' 조반니의 고독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 일하러 떠난 아빠 대신 엄마를 보살피는 조반니. 마침내 아빠를 만나러 먼 여행을 떠난 조반니. 그 여행이 죽음에 대한 은유로 읽히든 읽히지 않던 약하고 어린 소년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지훈이도 엄마를 만나러 떠나고 싶을 것이다. 달려가서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을 것이다.
마음껏 어리광도 부리고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싶을 것이다.
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소년에게 엄마를 찾아주어야지. 그리고 나의 엄마에게도 건강을 찾아드려야지. 오직 마음속으로만 주문을 외우는 내가 있다. 다음 주에도 소년이 잠시 엄마와 만날 수 있는 수업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매거진의 이전글모네에서 세잔까지 전시회 유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