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 소설

때로는

by 이은주


진우를 돌보기로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나는 규칙적으로 생활했고 더 푹 자도록 노력했다. 부엌에 서서 마른 행주를 적셔 식탁을 닦을 때나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 때 잠시 상념에 젖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영락없이 학교 들어가기 전의 몇 개월을 다시 살다 오는 것이었다. 일식집 가옥에 현관문을 열면 바로 나무 계단으로 이어졌고, 계단을 다 올라가면 탁자 위에 전동식 연필깎이가 나사로 조여져 있었는데 어린 눈에는 위협적으로 보였다. 사촌 언니, 오빠들이 그 전동식 연필깎이에 연필을 꽂아 윙 소리를 내면 나무향이 나면서 털스웨터 보푸라기 같은 가루가 날리고는 했다.
나와 남동생은 엄마 손에 이끌려 잠시 고모 댁에 놀러온 줄 알았지만, 온다던 엄마는 오지 않았다. 날마다 기다렸고, 날마다 울고 싶은 어린이였다. 그런 나에 비해 남동생은 감정에 충실했다. 보고 싶으면 울었고, 과자가 먹고 싶으면 떼를 썼고, 놀고 싶으면 놀았다. 나는 왜 자꾸 그때로 돌아가 있는 걸까. 오십 여년을 살면서 그깟 몇 개월을 잊지 못하는 걸까. 버려진 느낌을 잊고 있었는데 내 삶에 진우가 들어오면서 그 몇 개월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 진우의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를 데리러 올 시간이 지났는데 할머니도 엄마도 안 와서 연락처를 찾아 전화가 온 것이다.

진우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나는 묘하게 쓴맛을 느꼈다. 그것은 피 맛, 범죄의 예감.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때로는 9시 뉴스를 장식할 것 같은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나는 종종 살의를 느낀다. 왜? 나도 모르겠다. 누구를? 불특정 다수를. 이런 살의를 글로 써본 적도 없고 말로 표현해 본적도 없지만 나는 분명히 느꼈다. 죽이고 싶다는 감정을. 그러나 실천해 본적은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다. 주인공들이 죽어나간다. 혁명이라는 이름 하에서 괴물이 되어 죽고 죽이는 <악령>의 등장인물들이 나는 좋다. 읽고 있으면 복잡한 내 상태가 바로 납득되고는 했다.

내 곁의 <악령>들린 형제들, 가족들.
진우를 두고도 모두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채 화를 내고 사라져버린 진우 할머니와 진우 엄마 그리고 멀게는 진우의 아빠와 친가를 냉정하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 거야 진우야.’

감정조절을 못하고 분노조절을 못하는 건 유전일 수 있다. 나는 꼭 그 습성을 끊어버리고 말거야. 우울증 약을 먹어서 무기력해진다고 해도, 약물 후유증이 남는다고 해도 나는 감정을 일정 온도로 유지시킬 거야.
행주질을 마치고 빨래를 다 넌 다음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 자동차 놀이를 하던 진우가 다가왔는데도 생각에 몰두하여 인기척을 못 느낀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응? 아니, 왜?”
“금방, 울 것 같아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아니야, 라디오에서 슬픈 음악이 나와서 그래.”

아이의 눈을 조심해야 해. 마음까지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진우야 다시는 이런 얼굴로 저녁준비 안 할게. 울 것 같은 얼굴 안 할게.
저녁식사를 하고 어둠이 내리고 아이의 목욕을 돕고 잠자리를 준비한 뒤 함께 눕자 진우가 약을 챙긴다.
“아 참, 약 드셨어요?”
“그래, 조금 전에 부엌에 가서 물 마실 때 먹고 왔어. 고마워.”
내가 아이를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때로는 아이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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