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이는 내 말을 기다리다가 아무 말도 없자 티브이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상념에 잠긴 채 로봇처럼 깍둑썰기를 하는 동안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병든 가족을 돌보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연한 일의 결과가 ‘질병의 완치’라고 믿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병은 완치되었으나 삶의 태도나 방식은 그대로일거라는 걸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것이었다. 먹기 싫으면 안 먹다가 병이 나는 식의 다른 형태의 변주곡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날이 흐리다 맑게 개었다가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지는 것 말고도 다른 심술을 부릴 줄 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 도시에서 진우 엄마로 살면서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우선 나이를 숨길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학부모로 보이기 보다 할머니에 가까웠다. 나는 할머니라는 사회적인 위치가 사회에서 가지는 한계를 안다. 일단 사회적인 목소리를 낼 때 의사반영이 불리하다. 이 사회는 젊음만을 전재로 하여 생산하고 소비되고 있다. 할머니 의견 따위는 그들 소비자 니즈에 포함되지 않는다. 학교도 소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할머니여서는 안 되는 무엇을 감지했다. 소외계층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코로나로 학교에 나갈 수 없을 때는 문자로 알리기만 했었다. 개학을 해서도 열이 나면 그것이 코로나가 아닌 감기 증상일 때조차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알림이 오고는 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우는 진우를 보고 싶어 하던 할머니 댁에 가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날도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요구여서 미처 대처를 하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은 마치 내가 아동 학대라도 한 듯이 진우의 목소리를 들어야겠다며 다급하게 전화기 너머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 전에도 진우가 감기증상이 있어서 결석을 할 때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던 선생님이었는데 믿을 수 없는 응대에 나는 녹음을 눌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진우의 담임선생님은 이쪽이 녹음을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맥락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저와 진우는 이렇게 소외계층이 되는 겁니까. 통화기록을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미처 상의를 못드린 양육자로서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돌봄선생님께 미리 양해를 구한 것으로 선생님간의 업무전달이 이루어졌는줄 알았어요. 줌수업 출석에 대한 건은 정말 유감입니다. 아울러 진우는 청소년센터에서 파닉스 수업으로 줌수업을 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진우의 담임선생님은 통화하는 동안 계속 학교로 오면 줌수업 듣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만 했지, 이쪽의 설명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동의 가정형편상 줌사용이 용이하지 않으리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동학대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에서 교육에 대한 교사의 철학을 느끼기 보다는 직업으로서의 교사가 자신의 업무에 방해가 되는 아동에 대한 업무처리 방식이 엿보일 뿐이었다. 줌수업에 출석하지 않은 아동이 학대에 노출된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그날의 통화를 좌우했다. 어떤 사건, 사고가 있을 때 우리가 대처하는 방식이 이렇다면 곤란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에 상응하는 대화는 생략되고 마치 취조를 하듯 짧은 시간에 원하는 정보만 얻으려하는 초등학교 교사에게서 나는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쪽이 아동의 보호자를 못 믿는다면 이쪽도 믿을 수 없다. 소통이란 없는 담임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학교의 수직구조에 혀를 찼다.
나라에서 무료로 의무교육화했다고는 하지만, 양질의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요구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