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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Apr 30. 2019

빠삐용(1973년)




어렴풋하게 줄거리만 기억할 뿐인 영화 빠삐용.
이모와 삼촌들이 지금의 나보다 10년쯤 젊었을 무렵 상영되었던 영화. 주말의 명화극장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던 나의 유년이 그리워지게 하는 영화 빠삐용. 그가 탈출에 성공했는지 궁금해하며 잠에서 깨어난 일요일 아침 tv에서는 '은하철도 999'를 했었다.

유년 시절의 그리움 일부와 빠삐용의 일부가 동시에 상기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어쩌면 아쉬움에 대한 감정의 미묘한 움직임을 빼어나게 묘사한 빠삐용의 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독방에서 빛도 없이 6개월간 소량의 식사로 견디던 빠삐용이 본 꿈과 환상과 같은 것. 꿈에서 빠삐용은 재판관에게 묻는다. 
내 죄가 뭐요?
인생을 허비한 죄.
빠삐용은 또 환상도 본다.
멋지게 차려 입고 환호하는 인파 속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자신과 드가의 모습.

좋은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해 함께 대화할 수 있을 때 영화보기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오늘은 빠삐용을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인형의 집 언니와 만나서 2시간 30분이나 되는 빠삐용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그녀는 놀랍게도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빠삐용이 위조 지폐범 드가를 구하려다 첫번째 탈출을 시도했다가 2년 동안 독방 신세를 진 일. 그 독방에서 죽지 않기 위해 바퀴벌레를 먹던 일. 위험을 무릅쓰고 빠삐용에게 사식으로 코코넛을 넣어주던 드가. 코코넛 속에 드가는 짧은 메시지를 전한다.

코코넛을 잘 씹게나.
그리고 연한 부분은 삼키게
 하루에 하나씩 힘내기 위해
 나의 마음은 너와 함께 있다.
굶주림 속에서 얻은 코코넛. 빠삐용은 한입 가득히 코코넛을 먹는다. 그의 표정만으로 코코넛의 풍부한 맛과 드가의 우정의 깊이가 몸 구석구석에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간수의 폭력으로 망가진 안경을 고치고 있는 드가에게 함께 있던 동료는 묻는다.

어떻게 생각해 성공했을까 못했을까.
너는 내가 어떤 말을 하길 기대하니?
그 사람은 내 목숨을 구하려고 자기 목숨을 걸었어.
나에게 그건 새로운 경험이야.

항문에 숨겨둔 돈을 탐하는 수인들 속에서 드가를 보호해주던 빠삐용, 간수에게 구타당하는 드가를 감싸주던 빠삐용, 드가가 사식으로 넣어준 코코넛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서 6개월 동안 빛도 없는 독방에서 견뎌야 했던 빠삐용에 대해 드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그건 새로운 경험이야.
독방 생활을 마치고 나온 빠삐용에게 드가는 묻는다.
어떤가. 좀 어때. 
괜찮아. 
내 이름을 댔었다면 더 건강 상태가 더 좋았을 텐데.
거의 그럴 뻔했어. 
누가 언젠가 그러더라고 유혹을 참는 정도가 인격의 진정한 척도라고.
키홀 포티에서 어떻게 나왔나.
아내와 변호사에게 말해 자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증인 중 한 명을 돈주고 설득할 수 있다네. 
이봐 친구 자넨 내게 빚진 것이 없네.
자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 줘.
배.
미처 몰랐군.

빠삐용의 두번째 탈출을 위해 드가가 배를 준비해 준다. 그러나 그 배 역시 형편없이 낡았다. 아랍인 의사에게 속은 것이다. 배를 구하러 나환자촌에 들어간 빠삐용에게 나환자인 대장이 시가를 권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빠삐용은 나환자가 물던 시가를 받아 한모금 쭉 빤다.
빠삐용을 시험한 대장과 그 시험에 통과한 빠삐용 사이에는 미묘한 신뢰감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최악의 시간에 대화를 할 수 있고,  그 대화 속에서 서로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여유를 보이는 빠삐용을 스티브 맥퀸은 푸르고 시원한 눈빛으로 표현해준다.
배를 얻어 탄 빠삐용 일행은 그후 태풍을 만나고 뜨거운 태양을 견디며 항해를 하지만 결국 뿔뿔이 흩어진다. 어렵게 탈출에 성공한 듯 보였던 빠삐용이 수녀에게 배반당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사랑과 용서를 지향하는 종교인과 세상의 변방으로 밀려난 나병환자의 태도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수도원의 원장에게 속아서 다시 5년간의 긴 독방 생활이 시작된다. 
빠삐용은 프랑스령인 남미의 섬 기아나에서 상어가 득실대는 악마섬에 보내진다. 그들이 처음 유배지에 올 때 나누던 대화처럼.
저것은 생조셉
 저것은 로얄섬이지.
오른쪽은 악마섬이다.
쥴로 저기서 탈출하는 게 왜 어렵지?
본토까지 사람이 헤엄쳐갈 수 있는 거리인데.
아냐 아냐.
헤엄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거야.
아냐 아냐
 헤엄은 좋은 방법이 못돼
 조류가 너무 세서 시작한 위치로 밀려 돌아오게 될거야.
아나? 저 섬에 가게 되면 영원히 거기 있어야 돼.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마로니 강으로 가지.
그리고 쌩로랑에서 내린다.
거기서 그들은 너희를 어디로 보낼지 결정하지.
노동캠프인지 섬인지 말이야.

마침내 악명 높은 악마섬에서 빠삐용은 드가와 재회를 한다.
드가는 빠삐용을 보자 이렇게 말한다.
 "여길 안 오길 바랬는데."
 "자네 바닷가재 좋아하나?"
이렇게 아무 뜻도 없는 듯한 대화가 그들의 천겹 만겹 되는 인연과 회환과 애증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준다. 이제 드가의 머리는 한뼘 정도 빠져 있다. 빠삐용도 나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빠진 이와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프레디와 아담(돼지이름)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드가에게 시험용 코코넛 자루를 들고 온 빠삐용은 "산책 좀 하자."고 말한다.
지칠 줄도 모르는 빠삐용의 탈출은 다시 시도되고, 그는 일곱 번째 파도를 기다렸다가 코코넛 자루를 타고 헤엄쳐 갈 방법을 생각해 낸다.
 "만약 우리가 간다면 당근을 챙겨야겠네."라고 말하던 드가는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머뭇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할 이야기가 있네.
자네 죽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제발 그만 두게나.

그러나 빠삐용은 절벽 위에서 몸을 날린다.
새처럼 허공을 나르는 빠삐용.
푸른 하늘과 구름을 등뒤로 한 드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다가 멀어져 가는 파도 물결. 그 파도를 지켜보는 이의 가슴 속에서 포효하는 또 하나의 파도. 또 다른 하나의 드가가 있다. 
하모니카와 피아노 연주로 된 배경음악을 타고 빠삐용은 천천히 헤엄친다. 하늘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친다.
 "야! 이놈들아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2005/02/1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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