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팅을 마치고 오전 내내 현오의 빈 냉장고가 걸려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까 하고 전화를 했지만 전원이 꺼져있었다. 나는 현오의 집을 나서기 전에 카카오톡 내 위치 보내기를 눌러 현오의 주소를 입력해두었다. 그리고 쇼핑몰에 500ml 물 한 박스를 주문하고 현오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이 갈 거야. 미니 냉장고는 물을 넣어두라고 있는거지.’
퇴근길 먹을 것을 좀 사들고 현오의 집에 가려고 슈퍼에 들려서 우유와 달걀 그리고 치즈와 토마토, 시금치를 샀다. 토마토 달걀 요리와 시금치를 넣은 달걀 오므라이스는 간단한 내 요기거리였기에 만들어 줄 셈이었다. 잘 익은 토마토의 경우 달걀에 어우러진 토마토즙은 어금니에 침이 고일만큼 맛있다. 현오는 그날 회사에도 가지 않고 핸드폰도 켜지 않은 채 술을 사와서 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의외였다. 현오가 이렇게 나약한 청년이었나. 방안에 작은 스텐드 불만 켜고 절망의 우물에서 우울을 길어올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나는 토마토 2개를 7분 만에 달걀과 요리해서 현오의 앞에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현오 앞에 앉아서 캔커피를 마시며 현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측 어깨에서 스텐드 조명을 받아 우측 턱과 뺨의 솜털 하나하나가 서있는 게 보였다. 현오의 수염은 아직 거칠지도 굵지도 않아보였다. 그에 비하면 내 턱은 오후가 되면 거칠어졌고 아침에 면도를 하면 푸른 풀밭이 되었다.
“먹어. 맛있어. 난 여름에 토마토만 먹어.”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나는 침묵을 깼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현오의 방안이 좁지만 정겨워졌다. 아무렇게나 쌓아둔 책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쌓아서 책등이 벽쪽을 향한 것도 있어서 무슨 책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두꺼운 책들. 사이사이로 포스트잇이 나뭇잎처럼 붙어 있었다.
“흠.. 우리 아버지는 자주 화를 내는 분이셨어. 아버지가 화를 낼 땐 이유같은 건 없었지. 나중에야 알았어. 아버지는 사회에서 좋은 사람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었거든. 거절을 잘 못하셨지. 마음이 약해서 자기주장 한번 펼치지 못한 양반이 집에만 오면 약한 엄마와 자식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어. 아버지가 문짝을 주먹으로 쳐서 구멍을 냈던 날 난 결심했어. 절대로, 절대로 결혼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자식도 낳지 않을 거라고.”
힘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현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아홉 살이었던 현오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어. 현오같은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 함께 여행도 다니고, 자전거도 타고 맛있는 것도 만들어 먹고, 농구도 같이 하고.. 현오와 함께 있으면서 나는 알게 되었어. 나는 아버지처럼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지. 그래서 감사해. 현오에게 감사하고 현오 너의 엄마에게도 감사해.”
“그런데 왜 헤어지셨어요?” 현오가 묻고 싶은 것을 묻고 이번엔 내가 대답할 차례였다.
“조금 복잡해. 시차를 두고 엇갈렸어. 엄마가 원할 땐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땐 엄마가 지쳐있었지. 한번 관계가 어긋나면서 우연이 겹치면서 서로 멀고 먼 인생의 항해를 계속 하느라 연결했던 끈이 스르르 풀어져버리거든.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현오가 따뜻할 때 토마토 달걀볶음을 맛보게 하고 싶어져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토마토 요리를 한입 먹고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말해줄래?”
현오는 그제야 순순히 토마토 한 조각을 떠서 입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현오의 턱이 좌우로 움직이는 걸 보는 동안 턱 안에 침이 고였다.
“맛있네요.”
“더 먹어. 많이 먹어.”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