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날 밤 현오는 엄마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내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헤어진 아빠와 다시 연락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현오의 고집을 꺽을 수 없어서 현오가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은 모르는 척 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에게서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현오는 자신이 아빠의 행방을 찾아 아빠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생활하는지 알고는 있지만 엄마에게는 차마 전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아빠에게 묻고 싶은 것은 절 보고 싶었는가예요. 그리고 왜 단 한번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는지도 묻고 싶었어요. 하지만 물을 수 없었어요. 아빠는 절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한참 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지금 돌봐야할 사람이 많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친할머니도 아프시고 늦게 결혼해서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말만 계속하셨어요. 저는 결국 아빠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영원히 들을 수 없었어요. 네가 보고 싶었다는 그런 말이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계단에 앉아서 캔커피를 마시며 나누던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갑자기 비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밤의 빗소리를 들으며 허둥지둥 버스정류장으로 달렸으나 이미 막차는 끊겨 있었다. 택시 정류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우린 흠뻑 젖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위아래로 입은 현오의 청색 바지와 셔츠에 짙은 푸른 물이 들어갔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쏜살같이 지나쳐갈 때 나는 굉음과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아스팔트 위의 붉은 신호등 불빛이 피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우린 말없이 택시가 오길 기다리면서 그 비를 다 맞았다.
현오의 집에서 목이 말라 눈을 뜬 나는 현오의 소형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찾았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달걀 한 개, 마른반찬 하나 없었다. 나는 개수대로 가서 수돗물을 마셨다.
이른 아침에 미팅이 있어서 현오가 깨지 않게 나오는데 현관 액자에 현오와 현오 엄마 사진이 있었다. 현오 엄마도 이제 중년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있었다. 웃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애틋한 정서가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아 피로해 보였다. 나는 문득 신발장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쉰세 살의 아저씨 얼굴이다. 정년을 12년 앞둔 채 앞으로 남은 인생은 낚시를 하며 노인 연금으로 먹고 살 생각이나 하는 심심한 중년. 현오에게 멋진 아빠가 되어주진 못했어도 이제라도 멋져 보이고 싶은 나를 깨닫고 렌드로바에 발을 집어넣었다.
photo by lam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