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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Apr 30. 2019

피와 뼈



1923년 흰옷을 입은 백성들이 오돌또기 타령을 부르며 현해탄을 건너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오사카를 향한 뱃길. 흰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와 푸른 하늘은 그들이 입은 순백의 옷을 더욱 눈부시게 한다.
오사카 항구가 가까워지자 희망을 찾아 떠난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가 나온다. 미래에 대한 기대에 부푼 모습을 한 청년이 아득히 먼곳을 향한 눈길로 미소짓고 있다. 그의 이름은 김준평.

영화는 김준평의 아들 마사오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아버지 김준평이 오사카에서 어떤 청년기를 보냈는지 모른다. 마사오의 입을 통해 준평의 아내 영희가 세 번째 결혼상대자인 김준평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간단히 소개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김준평. 그는 사물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무표정한 얼굴에 결코 움직이지 않는 시선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다. 때로는 폭력도 불사한다. 갑자기 나타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김준평에게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단지 가족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일 뿐이다. 타인보다 못한 아.버.지. 김.준.평.
오랜만에 찾아와서 아내에게 던지는 한마디는 "기무치"다. 김치가 고파지거나 여자가 고파지면 집을 찾는다. 

 '피와 뼈'에서는 죽음도 다양하다. 준평의 사생아를 자처하고 나타난 다케시의 죽음은 빗속에서 아버지와 사투를 벌인 후 사라진 지 열흘만에 야쿠자의 총에 의해 살해당한다. 하나코의 자살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준평에게 구타당하던 날 하나코는 쥐약을 먹는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선택한 자살은 미수에 그친다. 집이 싫어서 서둘러 시집을 간 하나코. 남편 역시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공중에 목을 맨 하나코는 비로소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머니 영희도 암으로 죽는다. 일본인 첩은 급성늑골염으로 앓다가 준평의 손에 의해서 살해된다. 영화는 이런 다양한 죽음을 지나치게 드라이하게 처리한다. 슬프거나 아픈 감정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관객은 가위에 눌린 채 깨어나고 싶어도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남의 집을 허가도 얻지 않고 부수고, 구더기가 나오는 김치를 자신의 아들을 낳으라며 억지로 일본인 첩에게 먹이던 준평의 악행의 하이라이트는 고리대금을 받아내는 모습이다. "내 돈은 피와 같아. 내 돈 떼먹는 놈은 내 피 빨아 먹는 놈이야"
라고 외치는 김준평은 마시던 찻잔을 이빨로 부수고 나서 날카로운 조각이 붙은 찻잔으로 자해를 한다. 준평에게 있어서 돈은 곧 피며 생명인 것이다. 
 '양철북'이 독일의 일그러진 역사를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를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연출했다면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는 괴물 김준평을 통해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혼란한 일본을 배경으로 강자의 논리, 폭력의 논리에 희생당한 조선인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김준평이라는 인물은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야 했던 한국인 모습인 동시에 일본인의 실체이기도 하다.

 '피와 뼈'가 위대한 것은 식민지 강제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조선족,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조선족의 한과 뿌리를 구차하게 나열하지 않은 데 있다.
한가지 더 '피와 뼈'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여 마침내 자기 파멸로 치닫는 폭력성을 가진 김준평이 자신은 물론 타인의 삶까지도 파괴하는 모습은 과거의 일본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기도 하다. 괴물 김준평은 곧 일본과 한국의 그림자이다. 폭력은 전염성이 강하다. 낯선 것은 배척의 대상이 되지만 그 마음 뒤에는 전염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여 있게 마련이라는 분석심리학자 이부영 선생의 말처럼 김준평에게서는 일본과 한국의 그림자의 전형이 감지되는 것이다.

2005/03/2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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