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쿄 3부작

동경인연 최종 편집

by 이은주

<동경인연>의 최종 편집본을 보고 있다.

생각해보니 <동경인연>을 쓰게 된 동기는 나를 몽당연필아줌마라고 부르던 꼬마친구 H가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던 2016년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학을 앞둔 H가 프랑스 현지에서 조금이라도 시행착오를 줄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쓴 동경생활의 에피소드를 적은 H에게 보내는 편지가 <동경인연>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 * *


가을 밤은 추웠다. 해질무렵 산사에서 내려오는 종소리가 산정호수를 맴돌다 사라지는 걸 벤치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해 나는 친구를 잃었다. 또 자신의 미래에 대해 두려웠지. 이번 이사는 정말 사연 많고 탈도 많았다는 내 친구는 더 많은 친구를 잃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참인 때였지. (그렇다고 아줌마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건 아니야 난 베르꼬르의 '바다의 침묵'을 읽으며 어렴풋이 글쓰는 직업을 동경하며 100권의 책읽기에 정신이 없었으니까)나는 자신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를 타고 있었고 산정호수 벤치에 앉아 있었고, 산사에 가서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하였으나 방이 차서 잘 곳이 없다는 이유로 비박을 결심했지. 지금 생각하면 대책 없는 여행이었고, 참 위험한 여행이었어. 그 전에 할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다섯 살쯤 되는 한 여자아이가 아줌마 곁에서 놀고 있었어. 상념에 가득 차 있을 때는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아이는 아줌마 가까이에 있었지. 아이는 심심했던 거야. 산정호수 근처에는 크고 작은 식당겸 민박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아이였거든. 나는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꽃이며 나비, 토끼 등을 그려주었던 것 같아. 이윽고 호수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어. 아줌마는 하룻밤을 지낼 곳을 마음 속으로 정해두었기에 일어서서 아이와 작별을 했지. 산정호수 길목을 따라 걷는 데 아무래도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돌아 보니 아이가 아줌마를 따라 오고 있는거야. 헤어지기가 아쉬웠던 아이는, 하루종일 놀이 친구가 없이 심심했던 아이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고 그림을 그려 준 나를 계속 따라왔단다.


아줌마는 한 여름 동안 장난감 총으로 인형을 맞추면 인형을 주는 간이 오락실 뒤로 가서 박스를 주워다가 잠자리를 만들었어. 그리고 아이 손을 잡고 집에 데려다주었지. 10월의 밤은 추웠단다. 아줌마는 잠들기 전에 라이터를 사서 나뭇가지들을 모아 모닥불을 지폈지. 모닥불은 따뜻했고 산 속은 아주 깜깜했어. 그때 순찰을 돌던 그 동네 고등학교 미술선생님과 생물선생님은 밤이 늦었고 위험한 곳에 여학생이 혼자 있으니까 숙소로 얼른 돌아가라고 하셨지.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느냐면서 말이지. 아줌마는 프락치 오인으로 죽은 친구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같은 학생이면서 서로를 고발한다는 게 말이 되는지. 아니,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맞아 죽을 때까지 때릴 수 있는지.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동안 모닥불은 우리 셋의 얼굴을 영혼의 움직임처럼 타고 넘어다녔을 거다. 선생님들은 순찰을 돌기 위해 떠나셨고, 아줌마는 서둘러 흙으로 모닥불을 끈 후 간이 오락실 뒤 박스에 자리를 잡고 누웠어. 밤이 무서웠지. 원래 숲속의 밤은 무서운 법이거든. 잠시 후 사람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어. '어디로 갔지?' 좀 전의 한 분의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여자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어'라는 또 한 분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줌마는 돌아 누웠단다.

한밤에 아줌마는 동네 폭주족이 산정호수 길목을 달리는 소리에 깨었단다. 그때서야 실감할 수 있었어. 앞서 지나가던 선생님들이 이곳은 위험하니 숙소로 돌아가라는 말을... 몹시 무서웠지만, 두려움 보다는 추위가 한층 사무쳐서 아줌마는 쉽게 잠들지 못했단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12년 동안 줄곧 야영지를 다니며 텐트에서 잤던 걸스카웃의 경험은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거지. 무시무시한 추위와 두려움 속에 새벽이 왔다.


전날 아줌마는 산정호수 길목에서 젖은 낙엽향을 맡았었는데 새벽에 진한 낙엽향을 맡고 깨어 났지. 아줌마의 코가 뇌보다 먼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아줌마 얼굴 위로 어제의 꼬마 아이가 아줌마를 가까이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이에게서 나던 낙엽향에 잠을 깬 거지. 온통 추위로 얼어붙은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산정호수로 내려와 공동수돗가에서 간단히 세수를 했어. 그리고 아이 얼굴도 씻겨 주었지. 한동안 아줌마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함께 호수를 바라보았지. 감사하게도 아이의 체온은 따뜻했어. 슬슬 서울행 버스를 타러 갈 시간이 되었지. 어제처럼 아이는 산정호수 길목까지 따라왔지만, 내가 집에 가야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어. 아줌마는 종이에 여러 가지 그림들을 그려주고 인사를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 왔고.


훗날 비누를 사러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아줌마는 아이에게서 나던 낙엽향을 맡았단다. 그 낙엽향이 나던 비누 앞에서 나는, 수만가지 생각들이 교차했지. '아이야, 그랬던 거니? 너는 엄마가 비누로 얼굴을 씻겨 주었는데도 그날 나에게 네 얼굴을 씻기게 잠자코 있었던 거니? 차가운 물이었는데도 싫다고도 하지 않고... 너는 알고 있었니? 상처받은 마음은 타인에게 친절하게 할 때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내가 네 얼굴을 씻기며 얼마나 많은 치유를 받았는지 네가 알고 있었던 걸까.'

그날부터 나는 아무리 해도 여행을 즐기기 위해 떠날 수가 없게 되었구나. 아쉽게도 말이지.


2016.6.3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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