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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May 20. 2019

올드 보이&장미의 행렬(薔薇の葬列)

일본 만화작가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를 오마이뉴스의 김규종 기자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잘 만들어진, 그래서 더욱 허전한 영화 '(2004/01/07)
치밀한 구성과 반전이 준비된 올드 보이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느꼈던 감동은 이런 것이었지요. 이젠 헐리우드 영화를 영화관이 아닌 비디오로만 봐야겠구나.
 '올드 보이'의 짜임새 있는 각본과 촬영술, 분장술, 대담한 액션, 관객을 몰입시키는 배우의 연기는 국산 영화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김기자의 '잘 만들어진, 그래서 더욱 허전한 영화 '라는 평에 공감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요즘 한국 영화에서는 어쩐지 모범생 냄새가 납니다.
헐리우드 영화를 답습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할까요. 실험 정신이나 창의성이 결여되었다고 할까요. 이런 표현을 하자니 간판 스타나 탄탄한 제작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만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류승완 감독에게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느껴졌던 실험 정신, 사회 비판적인 대사가 발탈은 퍽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배우 최민식이 없었다면 '올드 보이'는 국산판 헐리우드 영화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 발탈의 견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 데크 '일본  ATG 영화 특별전'에서 상연한 마츠모토 토시오 감독의 '장미의 행렬'은 일본 영화의 힘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영화 팸플릿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장미의 행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현대 일본의 게이 세계에 투사한 1969년도 작품입니다.
전주국제영화제 소개 당시 '취향따라 골라보기' 코너에서 야한 영화를 보고 싶을 때로 분류되기도 했지요.
영화의 시작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일부분이 자막으로 나옵니다.

나는 상처이자 칼날이며
 사형수이자 사형집행인

 오프닝은 에디와 곤다의 베드씬.
 (곤다역의 츠치야 요시오는 구로사와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에 에디역의 피터는 '란'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입니다. 장미의 행렬로 영화 데뷔를 한 피터의 나이는 16살.)
곤다는 게이바 '준'의 오너이며 에디는 '준'에서 잘 나가는 호스트입니다. 이들의 관계에 목숨을 건 '준'의 마담 레다. 레다의 장례차는 영화 말미에서 레다가 자살하기 전부터 곳곳에서 편집되어 복선 작용을 합니다.
마츠모토 감독은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와 마약상을 하는 흑인 토니, 자칭 체 게바라인 영화 감독 후텐, 학생 운동을 하다 상처를 입은 청년을 등장시켜 혼란한 일본 사회를 가늠하게 합니다. 
1960년대 영화라고는 믿기 어려운 촬영술도 실험 정신을 느끼게 합니다. 강한 콘트라스트 화면, 하이 스피드, 특수 촬영 등등 지금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대범한 시간 이동을 시도합니다. 
관객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 듯 현재에서 과거. 과거에서 현재. 의미 없는 자투리 필름을 반복적으로 배치합니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쉬르레알리슴 영향이 컸으리라 추측되기도 합니다. 
무의식의 영역에 눈뜨게 한 초현실주의 영향은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감독 게바라에게 친구가 묻습니다. 
 "무슨 생각해"  
 "출구"
 "출구?"
두 번째는 거리에서 추근대는 아저씨를 피해 들어간 전시회에서 에디는 사방에 사람의 '눈'만을 오브제로 한 그림과 만납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들을 연상해도 좋습니다. 그때 에디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합니다. 아버지 얼굴이 불에 탄 가족사진을 지닌 에디의 과거. 그는 게이가 되기 전 홀어머니의 정사를 보고 살인을 저지른 경험이 있습니다. 고독한 소년기를 보낸 에디.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른 소년 에디는 "내가 태어난 날을 불태워 없앨거야"라고 말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키스합니다. 기억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 에디는 수많은 눈을 바라보다가 쓰러져 버립니다.
세 번째, 화면 가득  장미 한송이가 클로즈업됩니다. 알고 보니 엉덩이 가운데 꽂힌 장미 한송이였습니다. 
장미와 엉덩이. 영화 제목 '장미의 행렬'과 무슨 관계가 있기도 한 것 같고 없기도 한 것 같고...
발탈은 영화를 보면서 장미가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해 내려고 애썼습니다.
결국 마담의 자살 풍경에서 장미에 대한 상징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침대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죽어 있는 마담 레다의 주변에는 장미 꽃잎이 가득합니다.
장례식에 모인 게이 보이들은 말합니다.
 "마담은 장미를 좋아했어. 조화만."
장미는 여성을 상징하고 
 생화가 아닌 조화만을 좋아한 마담은 영원히 여성이 될 수 없는 게이 인생의 상징으로 읽혀집니다.
장미=여성
 조화=게이 보이
 장미의 행렬의 라스트 신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상케 하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에디의 책갈피에서 곤다는 자신의 얼굴이 불에 탄 가족사진을 발견합니다. 이윽고 곤다는 자살을 합니다. 곤다의 죽음과 가족사진과의 관계를 발견한 에디는 칼로 자신의 두 눈을 차례로 찌릅니다. 여자의 눈을 면도날로 절단하는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8)를 연상해도 좋습니다.
개인의 영혼은 끊임없는 부정에 의해 자기 자신에 이른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격렬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에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는 '장미의 행렬'  
마츠모토 감독은 게이 보이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소재를 가볍게 풀어내기도 하고 낯선 소재를 익숙하게 풀어내기도 하며 우울한 부분을 코믹하게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앞에서 '올드 보이'를 '잘 만들어진, 그래서 더욱 허전한 영화 '라고 했다면 '장미의 행렬'은 '잘 만들어진, 그래서 더욱 누벨바그를 복습한 느낌을 주는' 실험 정신의 영화라는 느낌이 듭니다.
단, 1969년 흑백 영화라는 점과 2004년 컬러 영화라는 점을 기억해 두십시오.

창조력이란 그것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현존하는 것을 뛰어넘어, 비구상(非具象)의 경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사전에서 찾아본 초현실주의-

2004/05/0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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