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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May 20. 2019

시간을 달리는 소녀(時をかける少女)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시에 전등을 켠다. 라디오 스위치를 켠다. 컴퓨터 전원을 켠다. 선풍기 버튼을 누른다. 이제부터 우리집 전기는 풀가동이다.
이방 저방을 왔다갔다 하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샤워기를 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쓴다. 온종일 신고 다녔던 양말을 비누 거품을 내며 빤다.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린다. 머리를 말리며 라디오를 듣는다.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동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었던 그때를 선택하게 될까? 돌이키고 싶은 순간, 후회로 남은 순간을 몇 번이고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식의 선택을 할까.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주인공 마코토가 타임리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씨네21의 오동진 기자는 별 4개를 주면서 이런 감상을 썼다. 마음이 흔들렸다. 여진이 길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지금까지 영화 ost를 한 시간 내내 듣고 있는 나. 가사만 들어도 마음이 흔들린다. 뭐지 이런 느낌은?
마코토가 시간을 되돌리고자 몇 번이고 계단을 뛰어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포스터에도 나왔듯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힘차게 뛰어오른다. 뭐랄까,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랄까. 내게는 그 장면이 그렇게 읽혔다.
미래에서 온 소년 치아키와의 이별 장면의 대사가 내 흔들림의 근원이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미래에서 기다린다구? 2007년 16살의 마코토가 20년 후 치아키와 만난다면, 그때 치아키는 몇 살이 되어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볼까. 내 앞서가는 성격은 로맨틱한 장면을 SF로 만들어 버린다. 
미래에서 기다린다는 치아키의 말에 마코토는 이렇게 말한다.
응, 금방 갈게.
뛰어갈게.
멋있다.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는 대답.
이것이 젊음이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의지에 변함없을 거라는 확신.
이 영화에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는 오직 한번, 오직 한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젊음. 그 젊음을 인식조차 못하고 지내다가 어느날 문득 자신의 나이 듦을 절박하게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엔딩곡의 가사는 언젠가 한번쯤 자신이 아닌,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나게 했다.

2007/08/22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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