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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May 20. 2019

수면의 과학


이상한 영화를 보았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테판과 이웃집에 사는 스테파니 이야기.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줄곧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꿈처럼 앞뒤도 맞지 않고, 연관성도 없으며 어쩐지 진실과도 거리가 먼 듯하지만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토요일 저녁 당뇨에 관한 요리책을 보고 열심히 상을 차린 나와 엄마는 조카들 공부를 시켜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아주 사소로운 언쟁을 한다. 다음 다음날 종로5가에서 산 혈당측정기와 당뇨병에 관한 책을 들고 엄마의 병실을 찾은 나. 엄마의 눈을 본 순간 엄마도 나를 미워한다는 걸 느낀다. 증오에 가까운 시선은 짧게 내 이마 위에 떨어졌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바쁘게 정보를 교환한다. 앞으로 몇 주차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면 설사가 나올 수도 있고, 조카는 8월부터 태권도 학원에 보내기로 한다든지, 새로 산 혈당측정기 사용법 등등.
이런 두서 없는 생각들을 하는 동안 스테판은 이웃집에 사는 스테파니에게 사랑을 느낀다. 베란다 문을 열고 이웃집 창문으로 건너가는 스테판. 그는 스테파니가 아끼는 인형 아기 조랑말을 몰래 가지고 온다. 조랑말 인형의 몸 속에 기계를 조립해서 걷게 만드는 스테판. 그는 그것을 다시 몰래 스테파니의 창문을 통해 가져다 놓는다.
스테판과 스테파니는 구름, 조각배, 숲속의 배 아니 배 안의 숲속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기서 잠깐, 나의 무의식도 활동사진을 찍듯이 함께 움직인다. 그들의 하얀 배, 물론 부직포로 만들었다. 그들의 하얀 구름, 물론 흰 솜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배를 띄운 바다, 물론 투명 셀로판지를 조각 조각 불규칙하게 겹쳐놓은 것이다.
이때 나는 책상 구석에 있던 B5 사이즈의 대봉투를 꺼낸다. 엄마의 단추가 든 유리병에서 붉은 큐빅이 달린 단추를 고른다. 
이때 털이 북실북실한 곰의상을 입은 스테판이 밴드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주 다정하고 귀에 익은 느낌의 노래를... 나중에 검색해 보니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After Hours란다. 
붉은 큐빅 단추를 검정색 실로 대봉투 한면에 꿰매자 멋진 CD케이스 완성.
꿈과 현실을 오고 가는 스테판의 사랑이 스테파티에게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자꾸만 어긋난다. 첫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한 장소에 왜 그는 가지 못했을까. 카페에서 그를 마냥 기다리는 스테파니에게 왜 가지 못했을까.
영화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공간에 그들을 데리고 간다. 아기 조랑말을 탄 그들. 숲속을 달려서 마침내 바다에 다다른 그들이 탄 하얀 배.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스테판의 달콤한 꿈 일부분이라고 해도 아름답기만 했다. 어쩌면 오늘밤 좋은 꿈을 꾸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엄마가 날 미워하고 있다는 걸 어째서 한번도 의심하지 못했을까. 40년 가까이 함께 했다면 사랑만큼 미움도 자란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일 텐데. 나는 모든 걸 너무 늦게 깨닫는다. 미운 나를, 그림자의 나를 이제껏 보지 못했다니. 자신이 정말 착한 딸이라고 믿고 있었다니. 세상에... 바보 같다.

2007/7/3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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