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도권에서는 화장장 부족으로 사망 후 열흘이 지나도 고인을 보내지 못하는 사례가 빈발한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 다음 단계인 ‘다사(多死)사회’에 접어들며 나타난 현상이다. <중앙선데이> ‘최인한의 시사일본어’(2023.7.8)에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혐오시설로 꼽히는 ‘화장장’은 심각한 사회 이슈로 떠올랐다. 요코하마시에서는 유가족들이 시영 화장장을 이용하려면 평균 5~6일을 기다려야 하고, 전통 장례 방식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서 직장(直葬, 조쿠소)이 확산하는 추세라고 한다. 직장은 장례식을 하지 않고 고인의 시신을 곧바로 화장한 뒤 이별하는 형태인데 장례 절차가 간소해 전통 장례 방식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일본인은 죽으면 99.8%가 화장을 한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장례식을 치르기가 어려운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국가가 장례까지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코앞에 닥쳤다는 최인한의 끝맺음 글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완독한 의료인류학자 송병기가 쓴 『각자도사 사회』(어크로스 2023)를 떠올렸다.
이 책은 노화·돌봄·죽음을 연구하는 의료인류학자가 집, 노인 돌봄, 호스피스, 콧줄, 말기 의료결정에 이르기까지 생애 말기와 죽음의 경로를 추적한다. 나아가 무연고자, 현충원, 웰다잉 등의 키워드를 통해 죽음을 둘러싼 국가와 개인의 관계, 관련 정책, 불평등 문제를 보여준다. 돌봄 노동에서의 여성 문제를 보는 시각도 날카롭다. 책 속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생명은 연장됐는데, 그 생명(노인, 산모, 환자, 어린이, 장애인 등)을 집 안팎에서 돌보는 일은 대부분 여성이 떠맡고 있다. 여성은 남녀노소 모두를 인간으로 만드는 돌봄을 수행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프거나 빈곤에 빠지거나 주변화되고 있다.” 나 같은 경우도 계속되는 돌봄으로 점점 아프거나 빈곤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돌봄이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적인 문제로 나아가야 할 때 마침 중요한 책이 나와 주었다.
노인 돌봄을 생각하다 한국은 출생률이 떨어지고 기존의 중년층들이 나이가 들면서 고령화 사회에 이어 초고령화 사회까지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2025년, 2년 남은 초고령 사회를 저지하기 위해 출생률을 높이려는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고령화 사회를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송병기는<2004년 보건복지 백서>를 예를 들며 ‘저출산·고령화로 명명되는 시대에 경제활동을 하지 않거나, 경제력이 약하거나, 부양자가 없거나,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는 인구, 즉 ‘의존적 노인’은 문제가 된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김성순 의원(민주당,보건복지위)의 대정부 질의를 인용하며 ‘노인 부양에 관한 국가의 시선이 가족에서 의료와 시설’로 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노동 능력을 상실한 의존적 노인’이 생산가능인구와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설계된 ‘장기요양보험’의 실체인 것이다. 이제 돌봄이 필요한 노인은 집을 떠나서 환자가 되어야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출산·고령화 위기 속에서 등장한 노인 부양 정책은 민간 시설의 설립과 운영 규제는 완화하되 비용 통제는 강화했으며 그 결과 노인 환자와 병상 수는 빠르게 늘었지만, 의료진과 돌봄 노동자 수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 요양보호사 한 명이 입소자 20명을 돌보는 요양원이 나오고, 간호사 한 명이 환자 40명을 관리하는 요양병원도 등장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의료진과 돌봄 노동자가 노인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존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적에 나는 읽던 호흡을 한 차례 늦추어야 했다.
왜 요양보호사로서 요양원에 근무했던 자신의 노동이 혹사당해야 했고, 매순간 어르신들을 돌보는 돌봄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화와 죽음이 공포가 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노인 돌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울림이 컸다. ‘존엄한 노년’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인구라는 정치적 상상에 기반한 미래의 불확실성과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논의의 결과물로 등장한 ‘불평등한 노년’을, 불평등한 삶의 형태를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기억해야 한다.
커뮤니티 케어를 생각하다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정책’이라는 소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송병기는 ‘커뮤니티 케어’ 정책포럼에 참가한 내용을 소개한다. 과연 ‘커뮤니티 케어’란 무엇인가, 패널들이 정책 담당 공무원에게 물었다. “포용적 복지국가로 향하는 담대한 걸음입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도 이해하지는 못한 듯 다시 물었다. “커뮤니티 케어란 게 뭡니까?” “우리 국민들이 지역 사회에서 통합적으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정책입니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영어 단어 커뮤니티(community)는 지역사회로, 케어(care)는 통합적 돌봄으로 번역한 듯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커뮤니티 케어란 노인 환자, 장애인, 정신질환자의 거주지로 찾아가는 의료복지 서비스를 확대하는 정책인가, 아니면 의료복지 서비스가 가미된 거주 시설을 확충하는 정책인가. ‘탈시설화, 탈가족화’라는 목표를 당국자는 ‘불필요한 입원’ 문제로 지적했다는데 보건복지부의 정책 안에는 환자의 집수리나 재가 서비스뿐만 아니라 ‘케어 안심주택’을 비롯한 공동주거 시설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환자가 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하지 않고도 가족의 돌봄 부담을 없애는 방법중 하나가 또 다른 시설 입소였다고 지적한다. 커뮤니티 케어가 탈시설화를 표방하면서 ‘시설화’를 실천하는 정책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또한 환자가 집에 있으면 돌봄의 가족화이고, 시설에 있으면 돌봄의 탈가족화가 되는 것인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노인의 입원을 가족이 없거나 변변치 못해서 생긴 문제’로 바라보는 시선도 여전하며, 커뮤니티 케어 정책은 노인의 돌봄을 부담스러워하는 가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독박육아처럼 ‘독박 부모돌봄’을 하는 나는 내심 커뮤니티 케어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엄마의 돌봄을 부담스러워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강연 의뢰로 지방에 갈 때 엄마를 돌봐줄 단기보호시스템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청 공무원들을 찾아간다. 구청 공무원에게 ‘커뮤니티 케어’는 ‘명단’이었다. 주민센터 공무원들에게 물었다. “늘 하는 일이 커뮤니티 케어인데 또 무슨 커뮤니티 케어를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들에게 커뮤니티는 관할구역이었다. 이번에는 보건소장을 찾아갔다. 의사들이 왕진을하고, 스마트 기기로 집에 있는 노인들의 건장을 살피면 불필요한 입원이 많이 줄어들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왕진은 임종 이후 절차에 대한 보호자의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준다. 주치의가 사망선고를 하고 사망진단서를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 의사들의 생각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고 했다. 합리적인 왕진 수가도 없이 어떻게 의사들이 노인 집에 가느냐고 말이다. 다음은 정책 대상자를 만났다. 방문한 할머니에게 커뮤니티는 가족이고, 케어는 애틋한 마음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할머니가 수급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으로 할머니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할머니가 취약한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지 않은가 묻고 있다. 어설프게 돈을 벌거나 건강하거나 딸과 교류를 하다가는 수급자 자격을 박탕당할 수 있는 구조, 얼마나 많은 공무원에게 서류와 말로 자신의 취약함을 증명해야만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지적하고 있다. 이상으로 『각자도사 사회』를 통해 커뮤니티 케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행정편의주의를 살펴보았다.
노인 돌봄, ‘돌봄의 온도’에서 길을 묻다 지난 여름 엄마와 나는 치열했다. 때때로 엄마와 나의 위치가 바뀌었다. 엄마는 소녀가 되어 졸랐고,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걷지 못하다가, 기력을 되찾았다가, 더 나빠졌다가, 훌륭하게 극복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떤 규칙이 있는지 밝히고자 했던 노력을 멈추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끌어내 쓰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지칠 때면 내가 운영하는 ‘친구가 모두 나보다 잘나 보이는 날엔’ 밴드에 글을 올렸다. 그 커뮤니티는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헤르츠나인 2019)를 출간했을 무렵 만든 것인데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요양보호사 선생님들과 재가방문 선생님, 부모돌봄하는 선생님이 답글을 달아준다. 이런 글도 올라온다. 「오늘 남편이 파킨슨 판정을 받았어요」라는 글이 올라오면 ‘나는 십년 동안 파킨슨인 엄마를 돌봤어요. 우리 함께 힘내요.’ 그리고 ‘파킨슨에는 어느 병원, 어느 선생님이 잘 보세요’라는 정보도 올라온다. 고영직의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살림터 2020)에서처럼 ‘행정이 주도하는 방식보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려는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커뮤니티 케어는 어디까지가 가능하고,어디까지가 불가능할까. 갇힌 돌봄에서 소통하는 돌봄, 건강한 돌봄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누구의 손을 잡을 것인가. 누구에게 부탁을 할 것인가
지속가능한 돌봄을 위해서 나는 우선 가족들에게 부모 돌봄을 사랑과 의무로 여기고 함께하자고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다음에 자기돌봄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돌봄의 온도』(헤르츠나인 2023)에서 제안했듯이, 독박 육아가 힘들다고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지원사업을 하는데 ‘독박 돌봄’에 대한 대책 마련은 없다. 부모돌봄이 긍지가 되는 사회가 되려면 돌봄 휴직과 돌봄 수당 역시 필요하다. 또한 부모돌봄이 10년, 20년씩 장기화된 가정에게는 여행 바우처를 지급하는 걸 제안한다. 부모 근접권을 두어 부모가 사는 집 근처로 이동한다면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제도는 또 어떨까. 기존의 요양보호사를 중심으로 부모돌봄에 우왕좌왕하는 세대에게 돌봄 친구제도를 주어서 노화(老化) 단계별 안내를 받을 수 있게 하여 돌봄의 질을 높인다면 노인의 존엄한 삶과 죽음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차별 없이 존중받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