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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Jun 01. 2019

시 읽어 주는 영화, 동주

5시간의 식당 일을 마친 후에 4만 원을 받아 든 나는 '동주'가 상연되는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고 싶던 영화도 보았고, 이제 집으로 돌아와 책꽂이 한켠을 채운 윤동주 관련 도서 가운데 민예당에서 나온 '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도 다시 펼쳐 읽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한 걸까. 내 마음이 어수선한 이유는 극중 문예지를 함께 만들던 여진이 윤동주의 시를 다 읽고 난 후  쓸쓸해졌다는 감상과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어쩐지 쓸쓸해진 나는 방안을 서성 거린다. 유학시절 수많은 과제물로 원고지를 메우다가 글이 막히면 좁은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습관이 다시 살아난 걸까. 6년 동안 살았던 4조반의 다다미 방도 아닌데 맴을 돌듯 방안을 거닌다.


동주를 관람하는 내내 나는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어릴 적 본 것도 같다.

어딘가에서 만난 듯도 하다.

어디였을까, 동주. 윤동주를 보았다면,

어디서 만났을까, 동주. 윤동주와 만났다면,

그래 그는 곳곳에 있었다.

빈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길에 나가면 만날 수 있다.

연세대학교 핀슨홀을 지나 언더우드 건물 위에 새겨진 대리석 무궁화 속에도 있고,

윤동주 시를 완역하고자 한국에 1년 동안 교환 교수로 오셨던 모리타 선생의 눈 속에서도 있고,

말이 서툴러 의기소침해 있던 니혼예술대 청강생 시절 비교문학 시간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흰 셔츠의 검정 바지의 청년 뒷모습에도 있으며 해가 진 후 더욱 새파랗게 보이던 밤하늘 속에도 그는 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 위로 비가 내릴 때면 맡을 수 있는 낙엽향에도 있고, 또박또박 연필로 눌러 쓴 노트에도 있고, 코끝이 시리도록 쨍한 겨울 바람 속에서 조차 그는 살아 있다.

마치 그가 쓴 자화상처럼 그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잊혀졌다가 새록새록 되살아나 내 곁에 산다. 


'부끄운 걸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거지.' 동주가 찾아 뵌 정지용은 말한다. 詩, 그만 써. 창씨개명이라니, 일본이름으로 일본 글을 쓰라니. 연전에서는 조선어 교육을 못할 텐데. 어떻게 할 건가. 차라리 일본으로 가게. 일본에도 좋은 선생이 많아. 나도 교토에 있을 때가 좋았어. 자네에게 일본에 가라고 권하는 나도 부끄럽고(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일본에 가는 것이 부끄럽다는 동주), 그렇지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나. 부끄러운 걸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거지. 


정지용으로 분한 문성근 씨의 통절한 대사에서 전해지는 시대의 아픔이 뜨거운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처럼 따갑고 아프다. 이어서 '아우의 인상화'가 소개된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하나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다음은, 참회록이 이어진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같은 해에 태어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하기까지 윤동주 곁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안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송몽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42년 2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 독립을 위한 민족문화 연구는 고도의 한국문학을 연구하여 민족 특성을 발견·창달하는데 있다고  판단하여 그 해 4월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세계사와 문학 연구 등을 통한 민족문화 유지에  노력하였다. 


시를 쓰는 윤동주에게 행동가인 송몽규는 말한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뭐하러 문학하니?

시도 자기 생각을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동주가 답한다.

몽규의 표현에는 거침이 없다. 그러나 동주는 그렇지 않다. 동주의 표정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불꽃처럼 너울거린다. 그렇기에 이 논쟁은 처음부터 답이 없다.

여진을 바래다 주던 길, 동주는 여진에게 이와 같은 말을 듣는다.

동주가 시를 사랑하는 만큼, 몽규도 세상을 사랑해서 그런거야.

문예지를 만드는 데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었던 몽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문학작품을 통해 독립으로 가는 길을 모색했던 몽규의 눈에는 동주의 시쓰기가 그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 문학 속에 숨고 싶은 것으로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과연 시가, 문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동주의 자의식은 '쉽게 씌어진 시'뿐만 아니라 '자화상'에서도 볼 수 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동주, 그는 살아서 추억이 된 사나이다. 그리하여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의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끝나버린 잘려나간 책이다. 누가 다음 장을 쓸 것인가. 바로 우리가 써야 한다. 치열한 글쓰기와 삶으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우리들의 윤동주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한 동시에 잃어버린 이야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은 말한다.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보고, 정지용 시인의 시에 나오는 교토의 압천을 걷는데 '윤동주를 죽인' 원수의 나라에서 그의 흔적이 남아 그를 기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영화 '동주'는 태어난 것이다. 내가 모리타 선생님 부부의 부탁으로 연세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찾아 안내했을 때 시비 앞에서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가 더 큰지, 연세대학교에 있는 시비가 더 큰지를 아내와 이야기하던 모리타 선생님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것과 같은 경험이었으리라. 눈을 감으면 그날이 떠오른다. 1960년 4월 도시샤 대학에 입학한 모리타 선생님이. 신앙심이 깊었던 청년 모리타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대학에 18년 전 윤동주가 다녔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을 것이다. 한국의 청년이 자신의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광복을 몇 개월 앞두고 옥사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서시를 읽으며 또 한번 받았을 역사적 충격을.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를 아끼던 다카마쓰 교수와, 윤동주의 시를 아끼던 쿠미코가 영화 속 이야기 중의 이야기라지만, 나는 매우 흥미로웠다. 한글로 쓴 윤동주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나아가서는 영어로 번역해서 영국출판사에 출간을 의뢰하자는 쿠미코의 제안은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씩은 소리를 내어 낭송했을 시의 울림이 혼자만의 기쁨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윤동주 시를 매개로 한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것은 국경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사실. 한 청년이 바다를 건너 훌륭한 스승을 찾아 떠났으나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낯선 땅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뛰어 넘는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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