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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Jun 01. 2019

귀향 1

영화 귀향을 보러 가는 길

영화 귀향을 보러 가는 길은 꼬박 1박 2일이 걸렸습니다.

귀향을 보러 가기 전날은 작은조카의 학부모회의가 있었죠. 학교에 가기 전 저는 빵집에 앉아서 친구에게 편지 한 통을 씁니다. 귀농을 떠난 친구를 못 만난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편지 한 통을 쓰고 막내조카에게 줄 소보로빵 하나를 사서 학교 언덕을 올라갑니다. 

길고 지루한 학부모회의가 끝나고 새학년 담임선생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학부모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아이가 앉는 교실 책상에 자리를 잡습니다. 저도 교탁에 놓인 좌석배정표를 보고 막내조카의 자리를 찾아 앉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막내조카의 책상서랍에 있는 교과서를 이리저리 구경합니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꺼내 메시지를 적습니다. 영어교과서가 왜 이렇게 하얌? 이라고 써두고 수업시간에 좀더 많은 키워드를 잡아내길 바랍니다. 국어교과서에 실린 정지용 시인의 시 옆에는 윤동주가 좋아했던 시인이라고 적어 놓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글 옆에는 이 시인을 주목해 달라는 메시지도 적어 봅니다. 한국사 교과서 목차를 살피니 역사는 근현대사가 빠진 채 조선시대에서 끝이 나있습니다. 저는 오전에 전철을 타고 오며 읽은 방통대신문의 기사를 고려시대 목차 곁에 필사합니다. 그 기사는 일본학과 교수인 이영 선생님의 글이었습니다. '고려의 외교 전략, 오늘날도 유효하다'는 부분을 막내조카에게 읽히고 싶었으니까요.


(중략) 중국의 힘이 커지는 것과 반대로 미국은 1945년 이후에 꾸준했던 세계 경찰 국가 역할을 점점 내려놓고 있어요.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죠. 이에 일본은 미국을 외교적 파트너로 구축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자국의 군사력을 키우고 있어요. 미국 또한 동아시아 국방 외교측면에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로 일본을 선택했어요. 여기에 중국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죠.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 외교 전략은 상당히 치밀해져야 해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미국과의 관계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14세기 후반 원과 명이 교체하던 시기 고려가 취했던 외교 전략을 참고해보는 것은 오늘날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고려가 멸망했기 때문에 지배계층이 무능력하다고 보는 경우가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거든요. 고려는 군사적, 제도적 개혁을 꾸준히 해왔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조선이 건국됐던 것이니까요.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장이잖아요.

고려의 외교 전략은 감탄할 정도로 훌륭해요. 왜구가 고려에 17년 동안이나 쳐들어 왔었는데 일본에 항의하지 않았어요. 북쪽에서 원나라가 고려를 계속해서 침략해왔고 여기에 국방력을 집중해야 했는데 왜구 침략 문제를 일본에 항의했으면 일본까지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겉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번지게 됐을 거예요. 왜구 침략이 성가셨지만 외교 전략책으로 그냥 둔 거예요. 그러다 원나라가 멸망해갈 무렵에야 비로소 일본에 고려국왕사절과 원나라 황제의 명령을 받은 두 사절을 보내 이중으로 압박을 가한거죠. 이런 식의 압박은 왜구를 금압하기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어요. 고려의 지략과 외교력이 상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고려의 외교전략처럼 우리나라도 어느 한 국가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안돼요.


물론 교과서 목차 빈 란에 이 글을 전부 다 옮길 수는 없어서 고려가 취했던 외교 전략부분만 발췌하고 나머지는 사진으로 찍어 카톡으로 보냈지요. 수업후 자율학습 시작하기 전인 막내조카에게서 온 문자는 극히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었지요. '집가서 읽어야할듯 빼곡하네요.'

'고려를 통해 본 외교정책의 지혜야. 이 부분 좀 멋져. 왜구침략이 성가셨지만 외교전략책으로 그냥 두다. 뭔가 있어. 지금의 외교 정책을 비평하는 거. 서로 민감한 사안을 드러내고 싸우는 게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지혜롭지 못하다는 것. 한국사람의 성격을 이용해서 중국이나 일본이 여러 사안을 국제법으로 끌어들여 분쟁을 일으킬 때 독도를 역사가 아닌 영토문제로 풀면... 독도 해역을 일본과 공동으로 쓸 게 뻔해. 괜히 문제를 크게 해서 우리나라 가난한 어민들만 피해볼 수 있겠지.'

막내조카의 답변은 칼같이 왔지만, 그 또한 간단합니다. '재밌네요. 역사로 배울 거 많은듯.'


막내조카의 담임선생님께서는 마침 한국사를 담당하신다고 합니다.  한일교사들이 함께 쓴 한일 공동 역사교재 '마주보는 한일사' 공동집필자로 참여한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학부모회의 후 소보로빵을 주기 위해 교정에서 잠시 만났던 막내조카로부터 담임선생님께서 역사책 저자라는 것과 다음주 한일역사 교과서에 대한 주제 발표차 유럽에 가신다는 뉴스를 미리 들은 터였습니다. 막내조카는 이보다 더 자랑스러울 수는 없다는듯 담임선생님의 근황을 늘어놓고 소보로빵을 우적우적 먹으며 자율학습실로 향합니다. 어쩐지 헤어지는 게 아쉬운 제가 아들, 뽀뽀는 하자. 싱긋 웃으며 멋적게 다가와 제 볼에 얼굴을 댔다가는 달려갑니다. 친구가 누구? 라고 묻자 고모. 하고 단답합니다. 이제는 엄마가 아니라서 머뭇거리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고모.라고 합니다. 아이의 뺨이 사실은 닿지 않았다 해도 저는 아이가 다가와 강아지처럼 저를 반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 주변에 떠다니는 공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풍요로운 기운이 나와 막내조카를 미래로 이끌어 줄 것을 압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방통대 중국현대문학론 출석수업 시험이 있었지요. 중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5.4운동이 중국에서 성공한 최초의 시민운동이라는 것을 배우며 한국의 3.1운동과 비교해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습니다. 역사는 흐름을 파악하면 단답형 보다 논술이 훨씬 쉬운 법입니다.

9시에 시작된 시험을 9시 20분에 마치고 나옵니다. 물론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방통대 특성상 논술 시험 대부분은 미리 문제를 알려주고 보지요. 저는 어젯밤 정리한 5.4운동이 중국현대문학에서 어떠한 문학사적 의미가 있는지. 좌익작가연맹이 제기했으며 구추백에 의해 정립된 보통화로 민중도 문학혁명에 참여하게 된 문예대중화론 내용을 정리해 쓰고 나옵니다. 다음 행선지는 씨네큐브에서 11시30분에 상영되는 '귀향'을 보기 전 서점에서 어제 메모해 둔 '마주보는 한일사'를 찾아 보기로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1.2.3권 모두 들고 오고 싶었지만 이번엔 한일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3권을 골라 머리말을 읽습니다. 


19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 각국은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들은 강제적 문호 개방에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ㅏ 서구 문물을 수용해 '새로운 국가 만들기'라는 시대적 과업에 나섰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각국 내부의 의견 차이와 외부의 압력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여 주었다. 결국 일본은 근대국가로 나아가게 된 반면, 중국은 반식민지,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 한국은 근대적 개혁을 위한 주체적인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지만, 나라 안팎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한편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한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하급 군인들이 실권을 차지했다. 군벌 중심의 이런 국가 구조는 일본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군사적 도발을 통한 무력 해결의 방식을 취하게 했고, 일본의 군사적 침략은 동아시아 각국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왔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역사가 불안정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새로운 미래를 만들려는 노력들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이런 노력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운동이었다. 이것들은 압박받는 민중의 연대를 가져왔고, 반전과 평화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중략)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세계는 기대와 달리 평화스럽지 않았다. 각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틀을 잡아 갈 즈음,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냉전 체제를 강화했다.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한반도는 분단되어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패전 후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던 일본은 미군의 아시아 지역 군사기지로 그 구실이 굳어졌고, 미군의 상당수가 주둔하던 오키나와의 반환은 늦어졌다. 한반도에서는 동족 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고, 베트남에서는 제국주의 국가의 탐욕과 냉전 논리가 결합해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일어났다. 두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베트남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 많은 폭탄이 떨어졌다.

한편 냉전의 전개는 핵무기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미 원폭의 피해를 겪은 일본이 1950년대 미국의 핵실험에 따라 바다에서 방사능 피해를 다시 겪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반핵 운동은 장기간에 걸쳐 일본 시민운동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그리고 냉전의 상징이며 현실인 미군 기지는 한일양국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미군 기지가 만들어진 지역의 시민들은 전쟁없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중략)

이 책의 일본 관련 주제들은 제국주의에 저항한 일본 민중의 모습을 많이 보여 준다. 또한 패전 이후 일본에 관한 주제들도 과거 기억에 대한 반성보다는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일본 민중의 노력들을 주로 서술한다. (중략)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냐는 개인의 역사적 성찰과 미래에 대한 의지에 달려 있다. 역사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의 삶과 의지가 인류의 평화와 화해, 공존의 나침반과 함께해야 한다는 전제가 꼭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교사들이 2002년 8월에 '마주 보는 한일사-한일 근현대사'출판을 합의하고, 그로부터 12년 동안 양국을 오가면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책을 펴냈다. 가해와 피해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지나온 길을 함께 되돌아본다는 데는 미래를 함께 설계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난 100여 년간 한일 양국의 역사와 관계, 우리 앞 세대들의 꿈과 희망, 고통과 절망을 다시 보면서 화해와 공존의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귀향을 보러 가는 길은 꼬박 1박 2일이 걸리고야 말았습니다. 영화 관람 전날부터 시작된 셈이죠. 여행을 떠날 때 그 지역 지도를 펼쳐 보듯이 말이지요. 그러니 이 영화 감상도 두 번에 걸쳐 작성해야 할 것 같네요. 피로가 몰려 옵니다.

2016.3.2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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