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틀비랩 글쓰기 강좌 과제물로 '그네의 아이'를 제출했는데 이번주에는 단편소설 안에 등장인물 셋, 둘은 동성, 나머지 한사람은 이성으로 A4 4장 분량을 써야한다. 각도와 거리, 표정이 상황 속에서 보여야 한다. 나는 과연 '치유의 글쓰기'라는 경계를 넘어 창작을 할 수 있을까?
이구아나는 장미꽃을 좋아한다.
작성일 : 2018년 7월 29일
사람들은 내게 충고하길 좋아한다. 나에게는 충고하지 않는 친구가 딱 한 명 있다. 내가 '울고불고'라고 별명 지어준 친구. 우린 가끔 만나서 맥주를 마신다. ‘울고불고'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회사일로 만났다. 북디자인을 담당하는 그에게 난 고객인 셈이다. 새로운 시안을 가지고 회사로 온 그와 저녁겸 술을 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날 우리는 망가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제 슬픔에 겨워 울기 시작했고,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자 나도 그냥 울어버렸다. 난 누가 울면 따라 우는 경향이 있다. 그날도 그를 따라 한참 울고 있자니. 정신을 차린 그가 “저를 위해 울어주시는 거예요?"하고 물어왔다. 이런 또 따라 울어버렸네. 창피하기도 한 난 술김에 반말을 해버렸다. 그날 이후 우린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난 그를 ‘울고불고’라고 부르기로 정했다.
북디자이너인 울고불고의 본업은 인형을 만드는 것이다. 아동극에 사용할 인형주문을 받으면 그는 밤새워 인형을 만든다. 작업실겸 집이기도 한 그의 지하실에 놀러 갔을 때를 기억한다. 홍대 5번 출구에서 한없이 꼬불꼬불한 골목을 지나가더니 5층 건물의 유리문을 밀고 곧장 지하로 내려가는 울고불고의 뒤를 쫓아 나도 서둘러 내려갔다. 건물 지하를 통째로 쓰고 있는 작업실엔 초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했다. 바퀴달린 테이블과 나무 의자, 발틀이 달린 재봉틀을 개조한 책상, 작업에 필요한 공구를 수납해 둔 선반과 자전거. 나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유리잔에 찰랑거릴 정도로 물을 따라 자신이 먼저 벌컥벌컥 마신 후, 내게 권하는 울고불고. 참을 수없이 애틋한 기분에 젖어 남겨진 반 컵의 물을 남김없이 마셨던 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죽 서울생활을 했던 울고불고가 이런 지하 보금자리를 찾기까지 얼마나 잠을 줄이며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을까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아, 이구아나 일거야.”
“이구아나?”
“응, 나의 유일한 동거인 이구아나.”
울고불고의 작업실은 간이침대에서 간이 세면대, 간이 욕실, 작업 테이블, 자전거, 냉장고, 가스레인지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이구아나라는 애완동물까지.
사각 어항에 들어있는 연둣빛 이구아나를 홀린 듯이 바라보는 나에게 울고불고가 어항 안에 손을 넣어서 이구아나를 꺼내준다. 조금 움찔하는 나의 어깨 위에 이구아나를 올려주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이구아나의 목덜미나 꼬리를 쓸어주는 그.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손놀림이라 나는 내 어깨 위에 이구아나가 있고, 불안정한 위치로 인해 이구아나의 발톱이 얇은 셔츠를 통해 어깨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이 싫었는데도 잠자코 견딘다.
“연둣빛 이구아나가 껍질을 벗으면 그 껍질이 진초록으로 변해.”
“이구아나에겐 뭘 먹이지?”
“집에서 먹는 야채. 호박이나 상추.”
“호박이나 상추?”
“그래. 호박이나, 상추.”
“얘 생김새를 보니 벌레들을 먹을 것 같은데.”
“아니, 얘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장미 꽃잎이래.”
“장미 꽃잎?”
“믿기지 않지? 인터넷에서 이구아나를 검색했더니 이구아나를 기르는 모임이 있더라. 이구아나가 설사를 했는데 그 색깔이 흰색이더라.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구아나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장미 꽃잎이다.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해서 다음에 울고불고의 작업실에 갈 때는 장미꽃을 이구아나의 특별 메뉴로 가지고 가기로 했다.
잠이 안 오는 밤에는 옥상에 올라가 별들을 본다.
작년 여름밤엔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소리에 놀라 뻣뻣해진 목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방으로 돌아왔다. 잠결에 엄마는,
“뭐해.”
“응, 별을 보다 왔어. 오늘밤은 유난히 별똥별이 많이 떨어지네.”
“난, 딸이 바보야.”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 이내 낮게 코고는 엄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새벽빛을 받은 얇은 이불의 흑백 물결무늬가 엄마의 모습을 한없이 축소시키고 있었다. 불 꺼진 방안에 서면 늘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한때 나는 엄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거야. 라든지 엄마를 기쁘게 해줄 궁리를 했었다. 요즘은 그런 감정에 대해 배반에 가까운 느낌으로 추억할 뿐이다.
만약 내가 엄마고, 엄마가 딸이라면 이라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은 때론 구체적으로 발전한다. 나의 어린 딸이 엄마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라고. 나는 딸과 함께 산다. 그리고 그 딸을 위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놀아주어야 한다.
나는 이런 속내를 곧잘 울고불고에게 들려준다.
그에게 내가 지어낸 조각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파편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도록 말이다.
“그러니까 너는 엄마가 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말하자면.”
못된 것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 울고불고. 난 신이 나서 장황하게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늘어놓는다.
“엄마와 딸의 역할이 바뀐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울고불고는 내 내면에 있는 말을 기대 이상 이해한다고 할까.
엄마를 부양해야한다는 마음 속 부담을 은근히 우회하고 있는 날 그대로 믿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한데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울고불고와 난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홍대앞 공원 그네에 앉아 있다.
줄어들어가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까이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와 바람에 실려 오는 풀냄새가 완벽하게 오감을 만족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길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울고불고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티티카카 섬은 하루에 일곱 번 바다 빛이 바뀐데. 티티카카 섬에 친구가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작은 가게를 하고 있어. 그곳에 가보고 싶어.”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크게 먹으며 티티카카의 바다를 상상한다.
“어제 온 편지에 친구는 조금 지쳤다고 했어. 서울이 그립기도 하구.”
“그런데 그 친구는 왜 티티카카에 있지?”
“사랑하는 사람이 그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고 있거든.”
“그럼 서울엔 안 오는 거야?”
“아니, 오기도 해.”
“이번엔 언제 오는데.”
“글쎄.”
우린 아이스크림도 다 먹었고, 그네를 타러 온 아이들도 있고 해서 공원 화장실을 들렸다 작업실로 간다.
“티티카카에서 온 편지 볼래?”
울고불고는 봉투를 건넨다. 거절할 내가 아니다. 나는 활자로 된 것은 뭐든지 읽는 버릇이 있다. 심지어 과자를 먹으면서 설탕이 몇 퍼센트 들어갔는지, 바닐라향료가 얼마나 들어있는지를 알리는 제조공정도 놓치지 않으니까.
티티카카에서 온 편지는 읽고 있는 사람을 섬으로 오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내가 울고 있는 동안 환하게 불 켜진 영화관 옆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울고불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수면 아래로 돌멩이 하나 소리 없이 떨어지며 알츠하이머병으로 죽은 아이리스를 표현한 라스트 신. 영화 상연 내내 늙고 병든 아이리스의 존재가 서러워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된 내게 휴지를 건네는 울고불고.
한손에는 손수건을 한손에는 휴지를 들고 좁은 영화관 계단을 다 내려와서야 울음이 그쳤다. 밤의 종로는 울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생명력이 있다.
우리는 조금 걸었다. 아니 걸어야 했다. 아직 우리들의 영화는 막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걸으면서 모든 소중했던 기억들을 하나 하나 상실해 가는 주인공과 집에 홀로 있는 엄마가 오버랩 된다. 엄마와 나와 추억들.
아이는 자라서 부모 곁을 떠나고, 부모는 나이 들어 자식 곁을 떠난다.
하지만 노인들은 이 세상이 아닌 곳,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세계로 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내가 있을 뿐이다. 나 또한 하나 둘 소중했던 사람들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때가 곧 오겠지. 이런 쓸쓸한 생각을 하며 종로에서 인사동까지 걷는다. 울고불고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갈까.
걷다 보니 인사동 거리를 빠져나와 신호등 앞에 멈춰서 있다. 길을 건너면 조계사가 있다. 우린 지금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난 홍대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그래? 난 5호선을 타야 하니까 광화문역에서 타면 돼.”
“작업실에 갈래?”
“아니, 집에 갈래.”
“그럼 밥 먹고 가.”
교보문고 뒤에 작고 아담한 스파게티 집에서 우린 치즈크림이 듬뿍 뿌려진 카르보를 청했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냅킨으로 닦으며 내가 묻는다.
“넌 어땠어?”
“뭐가.”
“아이리스.”
“좋은 영화야. 영국은 벌써 노인문제를 영화에서까지 진지하게 다루는 구나했지.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이르지 않아?”
“우리? 우리나라, 아니면 너와나?”
“둘 다.”
굶주린 듯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따분해하는 편인데 오늘 밤 나는 말이 많다.
버스 정거장에서 울고불고가 기다리는 131번을 함께 기다린다. 밤바람이 울고불고의 머리를 쓸쓸하게 헝클고 간다. 울고불고가 버스로 뛰어오른다. 창밖을 보며 빠이빠이를 하는 울고불고의 어디에도 쓸쓸한 기색이라고는 없는데 왜 난 좀 전에 그의 모습에서 쓸쓸함을 느꼈을까. 지하로 내려가는 작업실 계단이 어두우니까 조심하는 말이 하고 싶었다. 이구아나만이 반겨줄 지하 작업실에서 홀로 잠을 청할 울고불고를 태운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으면 이런 기분쯤 알코올처럼 바람에 흩어질 거다.
엄마는 잠 들어있다. 나는 불 꺼진 방안에서 옷을 벗는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이구아나가 껍질을 벗듯 그렇게 옷을 벗는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잠옷으로 갈아입은 난 엄마 곁에 눕는다. 잠든 엄마의 모습은 언제 봐도 그리운 기분이 들게 한다. 건강하고 젊었을 때의 바쁜 엄마 모습은 간 곳 없고 옛 추억을 불러와 마음대로 각색하며 시간을 보내는 엄마가 내 곁에서 잠들어 있다.
내일 난 두 건의 기획서를 작성해야 하고 필름 출력소에서 인쇄소로 넘기기 전의 마지막 필름교정을 봐야한다. 빨리 잠들어야 한다. 잠을 자야지. 잠이 올 것도 같다. 그런데 울고불고는 잠이 들었을까. 이런 벽시계가 열 두 번 종을 친다. 다시 한 번. 12시 반이군. 내 안의 시계는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잠이 들었나 보다. 꺼놓은 자명종 시계를 확인하며 부산하게 일어나는 내게 엄마는 언제 들어왔니? 하고 묻는다. 나는 손가락을 쫙 펴고 두 번 흔든다. 말할 시간조차 없다. 아침 미팅에 늦으면 사장은 자신의 철학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것이다. 어제 입은 옷을 대충 걸치고 현관 열쇠를 챙겨서 나오는 등에다 엄마는 소리를 높인다. 어제 온다던 택배는 안 왔다. 나도 소리친다. 엄마, 오늘 저녁엔 일찍 들어올 거니까 드라마 같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