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 소설

그네의 아이

by 이은주

당신은 다음 주까지 유년의 기억을 소재로 단편소설을 하나 써올 것을 과제로 내주셨습니다. 뒤풀이에서 지난주 과제였던 출간 이후의 나에 대한 글쓰기를 읽으셨는지 남해의 눈물에서 책을 내고 싶으신거죠? 라고 물으셨고 저는 네 라고 대답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사실은 당신의 출판사에서 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늘 그렇습니다. 소심하고 불안정한 여자아이가 자라지 않고 제 안에 숨어있어서 언제나 불쑥불쑥 제 생활에 나와서 마구 장난을 치고는 사라집니다. 남해의 눈물은 그저 요즘 읽은 책이 재미있었고, 지난주에 만난 하작가가 제가 번역한 미야모토 테루의 별들의 슬픔을 읽고는 미야모토 테루는 다자이 오사무와 김승옥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고 하여 도서관에서 김승옥의 책을 한아름 빌려와 읽다가 통영은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네..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박경리 하고 문인들 이름을 버스 안에서 손자가 잠든 틈에 중얼거린 이후 통영은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소설의 무대로 나오는 거리를 걷고 싶었던 것처럼... 그런데 무진기행의 무대가 된 순천이 아니라 왜 통영인가고 물으신다면 버스 안에서 읽은 책이 『그림으로 떠나는 무진기행』이었고 1부가 문인들의 출신지를 제주에서 만주까지 아울러서 그들 약력과 대표 시를 소개한 곁에 김승옥의 그림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가 경남 통영이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저의 유년의 기억을 불러오는데는 그네가 중요하겠군요. 그래요 안방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는데 삼촌은 그네를 달아주셨지요. 어린 저는 그 그네에 앉아 작고 앙상한 다리를 흔들며 할머니께서 밥 짓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할머니, 그녀 자신이 외동딸이었고 무슨 사연이었는지 새로 산 신발이 닳기도 전에 시집을 왔고, 시집을 오시기 전까진 사촌오빠 댁에서 자라셨기에 늘 엄마가 그리웠다지요. 그런 이유에서일까요? 저를 몹시 아끼셨어요. 저도 엄마가 그리워 할머니 품속에서 자주 잠이 들었죠.

저의 그네는 오로지 할머니 바라기를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네를 타고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은 없어요. 가마솥에서 하마가 하품을 하듯 하얀 김이 나오면 할머니는 대가족의 밥을 주걱으로 휘휘 섞으셨죠. 밥이 다 공기에 담기면 다음엔 누룽지 긁어내셨는데 그 모습이 아주 우아해 보였어요. 할머니는 누룽지를 먹으면 살이 찐다며 잔병치레가 잦은 저의 입에 넣어주셨어요. 그 순간 코앞에 다가온 할머니의 손가락에 묻은 밥알의 투명하고 앙증맞은 크기가 떠오르는군요. 저는 자주 아팠어요. 아픈 저는 늘 할머니에 의해 치료가 되었었죠. 아픈 아이가 할머니를 기다리며 그네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할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제 차례가 되기 어려웠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할머니가 엉덩이라도 붙일 시간이 나시면 저는 놀아달라고 조르는 거예요. 그럴 때 그네는 텅 비어 있지요. 할머니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 눈에도 빈 그네가 한없이 쓸쓸해 보였답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당신이 유년의 기억으로 단편소설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네와 할머니가 동시에 떠오르는군요. 고백하면 그네에 앉아서 할머니를 기다렸던 저는 사실 엄마를 기다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군요. 그때도 그랬지만,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 저는 단번에 속마음을 털어내지 못하네요. 또 제 안의 아이가 방해를 하러 왔다갔다 어슬렁대고 있나봐요.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으며 그네를 타던 아이는 사실은 마음속으로만 엄마를 그리워했답니다. 그립다는 말을 하면 할머니가 슬퍼하실 것 같아서, 할머니가 엄마 몫까지 사랑해주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걸 못 알아주면 낙심하실 것 같아서 저는 아마 마음을 숨기는 법을 터득했나 봐요. 마음을 숨기기. 꼭꼭 숨은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요. 엄마, 나를 찾아봐. 저에게는 태어나서 죄송합니다와 같은 정서가 있지요. 태어나서 엄마를, 할머니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아이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래서 일까요? 다자이 오사무의 삶에 관한 글을 읽은 저는 그의 글이 잘 읽혀지지가 않았어요. 책과 함께 다자이의 옷자락을 잡고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들기 때문이었죠. 제 속의 아이가 본능적으로 읽기를 거부하는 거예요. 위험해 하고.

할머니께서 불러주던 동요들은 어찌 그리 슬픈 내용뿐이었을까요? 뉴트롤즈의 아다지오에서 나왔던 가사처럼 죽음과 잠, 이 모두가 꿈이어서 그럴까요? 클레멘타인을 한번 불러드리지요.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가느냐. 그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는 늘 이런 느낌으로 가슴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이 구슬퍼서 잠이 들면 우리 모두 모랫속으로 사라질 듯 불안해 했지요. 불안했지만 또 그것은 달콤하기도 한 잠이었어요.

유년의 기억 중에 또 하나의 기억은 어른들이 두런두런 나누던 대화가 잠결에 들리던 일입니다. 저는 어찌된 일인지 자주 체하고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통에 어른들의 비밀 대화를 자주 들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어른들은 늘 비밀이 많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숨길 일도 아닌데 말이죠.

그 당시 제가 즐겨듣던 동화도 빼놓을 수 없군요. 옛날에 옛날에로 시작하는 동화‘햇님달님’에는 저와 같은 처지의 오누이가 등장합니다. 가난한 살림에 엄마가 떡을 팔러 나간 사이 호랑이가 오누이의 집으로 막 들어오려고 하는 먹으로 그린 동화책은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지요. 호랑이를 피해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가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되었다는 쓸쓸한 이야기에도 마지막엔 하하하 웃을 수 있었던 건 호랑이가 타고 올라간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서 호랑이 똥구멍에 수수가 콱 박혔다는 것이었죠. 전 지금도 제 어린 남동생이 마지막 내용을 따라서 콰악 하고 기합을 넣었던 부분을 녹음해 두었던 공테이프의 행방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일곱 살이었으니까 제 남동생은 네 살이었겠군요.

이렇게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다 보니 저는 이 글을 여름이 다 가도록 써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년에 대한 글감으로 그네를 떠올렸을 때 바로 멈추고 할머니의 재봉틀이라든지 가구처럼 나무문짝이 달리고 다리가 넷 달린 흑백 텔레비전에 대한 것을 택했다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억지로 햇님달님 동화를 끌어와서 그네와 연결시킨다 해도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서둘러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한숨 자고 싶으니까요. 이슬만 먹고 사는 귀뚜라미 여인처럼 살 수 없으니 내일은 일을 나가야하거든요.

유년의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그네를 불러온 까닭은 그네에 앉아서 할머니를 바라보며 엄마를 그리워했던 아이, 제 속에 함께 사는 아이와 이별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그만 그네에서 내려와서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멈추었던 성장을 다시 하든지 아니면 햇님달님의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든지 결단을 내려야겠기에 말입니다. 그네에 앉은 채 내려오지도 않고 땅을 밟지도 않은 채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꼭두처럼 나의 혀와 가슴을 지배하고자 하는 ‘그네의 아이’를 상여에 실어 태우겠습니다. 예전에 보아둔 ‘에쿠우스’처럼 사랑하던 ‘그네의 아이’의 눈을 멀게 하려고 합니다.


illustrated by Paz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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