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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Dec 31. 2020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족구왕(우문기,2014)

  

감독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오타쿠 쿠엔틴 타란티노, 마르케스와 라틴 아메리카를 사랑하는 왕가위, 이쯤 되면 명예 부산시장을 시켜도 될 법한 곽경택 같은 사람들.


우문기 감독도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과거를 감춘 은둔고수와 악당, 주인공의 이야기는 꼭 홍콩 무협 영화 플롯 같고, 각각의 컨셉을 가진 팀들이 벌이는 마지막 족구대회 장면에서는 자연스럽게 주성치와 벤 스틸러가 생각난다. 중간중간 후루야 미노루 만화 생각도 난다. 사실 영화 시작부터 대놓고 느낌이 온다. 

이렇게 솔직한 영화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군 전역 후 대학에 복학한 만섭(안재홍)의 삶은 얼핏 봐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학점은 간당간당하고 토익시험은 본 적도 없으며, 연애 경험도 없다.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며 고깃집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산다. 노답이다.

좋아하는 것은 족구. 전역하는 날까지 족구를 했고, 복학 후에도 틈만 나면 복학생 친구와 우유팩을 찬다. 지나가던 후배는 그들을 멸시하고 기숙사 같은 방 선배는 그를 볼 때마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고 다그친다. 

정말 족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복학생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총장과의 대화에서 사라진 족구장을 돌려달라고 말하는가 하면, 학교 표지모델 안나(황승언)에게 반해서 들이대고, 결국 안나의 전 남자친구 강민(정우식)과 족구 승부를 벌여 이긴다. 이 승부를 찍은 영상이 학생들 사이에 퍼지며 캠퍼스 곳곳에서 족구공이 튀어다니기 시작한다.


청춘은 동정의 대상이 됐다. 예전에는 ‘N세대’니 ‘W세대’니 하는 그럴듯한 말로 불렀는데 십 년 전에는 급기야 ‘88만원 세대’라는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만섭의 후배들이 노량진과 신림동에 틀어박혔고, 수많은 만섭의 선배들은 필리핀과 호주를 들락날락하며 스펙 쌓기에 열중했다. 

젊은이들이 사는 게 힘든 세상을 만들었는데 왜 화내지 않냐고 부추기는 사람에, 왜 노력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사람들까지 다들 족구하고 있다.


그래서 힘든 청춘을 위한 도서, 프로모션, 음악이 줄줄이 나온다. <싸구려 커피>가 나온지 십 년이 넘었는데 이따금 존버와 인생한방 모먼트가 생겨날 뿐, 달라진 것은 없다. 

믹스커피 광고만 더 힙하게-여기서조차 김현철이 1989년의 곡을 다시 부른다- 바뀐다.


그러고 보면 외환위기 시대 인디 씬 최고 히트곡이 “우리는 달려야해 바보놈이 될 수 없어” 하고 울부짖는 <말 달리자> 였고, 십 년 뒤의 최고 히트곡은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하고 읊조리는 <싸구려 커피>라는 점은 재미있다. 

세기말 홍대 펑크 라이더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하고 맨땅에 헤딩하는" 연대라면, 2010년대 관악/동작 포크 청년들은 "뒷걸음질만 치다 벌써 벼랑 끝으로" 몰려 각자도생을 걷는다.


그래서 X세대 청춘 회고담이 재미있다. 잘 팔린다. 십 년 넘게 90년대를 추억하는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다. 

젊은 날의 괴로움을 거쳐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얻은 3,40대의 지나간 시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

이들이 추억하는 90년대의 청춘은 자유롭고, 반짝반짝 빛나며, 아름답다. 

그 시절의 어두움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연세대 94학번들이 주인공인 <응답하라 1994>(tvN,2013)에서 연대 사태나 외환 위기는 축소되고 생략된다. 풍요로웠던 8,90년대 대중가요를 이야기할 때 그 많고 많았던 표절 사례나 방송사와 제작사의 무시무시했던 ‘갑질’은 나오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족구왕>이 재미있다. 90년대식 감성으로 말하는 2010년대 청춘들의 이야기다. 사랑했던 족구장을 떠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만섭의 선배, 고시원에 살며 외제차를 모는 강민에 비해 만섭은 혼자 다른 시대에서 온 것 같다(<백 투더 퓨처>의 인용 덕분에 더 그렇다). 

이 ‘별에서 온 복학생’에게 안나는 조금씩 호감을 느끼고, 취업 준비생들만 가득하던 캠퍼스에 족구 대회가 열린다. 정말 본 적도 없는 광경이다.


족구대회 결승전, 만섭의 식품영양과 팀은 강민의 해병대 팀을 누르고 우승한다. 부상 투혼도 보여주고 클러치 타임에 독수리 슛도 나온다. 안나도 만섭의 플레이에 감동하고 환호한다. 나올 것 다 나왔으니 응당 승리자가 명예와 상금과 사랑을 차지해야 한다. 

그러나 만섭이 승리하는 순간, 안나는 강민과 키스한다. 주인공이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여주인공이 연적에게 간다. 

그러나 만섭은 슬퍼하지 않는다. 사실 슬플 것도 없다.


언젠가 나는 하도 모두들 ‘힐링’ 을 입에 달고 살기에 내가 리니지 게임 안에 살고 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이곳이 리얼 월드인지 김택진 월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럽던 시절 <족구왕>을 봐서 다행이다.

만섭이 정말 <백 투더 퓨처>처럼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2010년대 대학생의 질문에 대한 만섭의 대답이다. 왜 족구를 하냐고 묻는 선배의 말에 만섭은 “재밌잖아요”라고 답하고, 다들 싫어하니 족구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안나에게 만섭은 “남들이 싫어한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같다고 생각해요” 하고 대답한다.


어쩌면 어른들이 청춘을 위해 해야 하는 말은 “네 잘못이 아니야”가 아니라 “넌 뭘 좋아하니?” 라고 묻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의 성공담과 위로를 들려주는 대신, 그저 잃어버린 족구장을 되돌려 주는 것 말이다.


https://youtu.be/VCPfIJo9T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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