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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Feb 04. 2021

어떤 러브레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민규동,1999)


고등학교 3학년의 봄,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공부도 못 하면서 주말 자습을 꼭 참석하는 학생이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창가 자리에 앉아 운동장을 보며 멍 때리고 있었다.

주말이라 교실이 한산했고 날씨도 좋고 해서 내 자리가 아닌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무심코 서랍 속에 손을 넣으니 편지 하나가 잡혔다.


예쁜 편지지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눌러쓴  러브 레터였다. 사랑한다는 말이 수십 번쯤 적혀 있었다. 수신인은 이 자리 주인. 그런데 발신인도 우리 반 학생이었다.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얼른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아이들은 책상에 코를 박고 공부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무도 못 봤다. 나는 편지를 도로 집어넣었다. 우리 학교는 남자고등학교였다.


홍석천이 커밍 아웃을 한 다음이지만, 당시 우리 학교 학생들의 동성애 인지 감수성은 거의 트럼프에 가까운 수준이라, 우리 사이에서 "이 게이 새끼"는 아주 유쾌하고 강도 낮은 욕설이었다.

너 나 우리는 모두 이성애자인 게 당연하고, 게이는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기에 그건 “이 탈레반 새끼” 와 같은 수준의 실없는 말이었다. 내부자, 혹은 ‘정상인’끼리의 결속과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그래서 나는 편지를 읽고, 우습게도 <올드 보이>(박찬욱, 2003)를 떠올렸다. 내가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언젠가는 귀갓길에 보라색 우산을 쓴 남자를 만나게 되고, 어딘가에 갇혀 15년간 군만두만 먹게 될 것 같다는 공포를 느꼈다. 어떤 의도로든 절대 말해선 안 된다. 모래알이든 바윗돌이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그때 나는 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장 몇 달 전에 한정판 DVD까지 샀었는데.


영화 초반, 민아(김민선)는 우연히 효신(박예진)과 시은(이영진)의 교환 일기장을 주워 내용을 읽고, 사귄다는 소문이 파다한 두 사람의 세계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그들의 세계에 스며든다. 이것은 영적 체험에 가깝다.

효신은 자기가 다른 학생들을 무시할수록, 다른 학생들이 자기를 경멸하고 괴롭힐수록, 점점 더 시은에게 집착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사랑을 보여주겠다며 교실 한가운데에서 키스를 하고, 끊임없이 시은과의 관계에 몰두한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시은이 버티기 힘든 일이다.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어! 하는 눈빛으로 구애하는 효신에게 시은은 "나두 너랑 안 놀아서 심심했어" 라며 어떻게든 관계의 무게를 줄이려 한다.


효신은 자신의 17번째 생일, 학교에서 투신자살한다. 시은이 자신을 창피해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가장 따뜻한 공간이었던 옥상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교사와의 관계로 임신해서 효신이 자살했다는 말이 떠돈다. 너무 현실적이라 소름이 돋는다.


교실에서 먼지처럼 떠도는 말의 힘은 얼마나 큰가. 아이들은 따돌림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신의 공포감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문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지원(공효진)은 교사에게 달려가 진실을 밝히라며 따지다가 뺨을 맞는다. 정말 '여고 괴담' 그 자체다.


효신과 시은처럼 내가 읽은 편지 속의 발신인(A)과 수신인(B)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졌다. 원래 그들은 사이가 좋아 당시 남학생들끼리는 잘 하지 않는 스킨십-무릎 위에 앉아 귓속말을 한다거나-을 하며, 쉬는 시간마다 교실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장난치며 놀곤 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나니 둘의 사이가 예전처럼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B가 A에게 큰 소리로 면박을 주는 일이 잦아지고, 늘 활달하고 까불던 A는 꽤 얌전한 학생이 됐다. 관찰을 눈치챈 걸까? 하고 나는 숨을 죽였다.


보통 남학생들의 친구 관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남자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파수꾼>(윤성현, 2010)을 보며 영화 속 교실의 냄새가 느껴질 만큼 깊이 공감했지만, 평범한 친구 사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언젠가부터 ‘평범한 친구 사이’로 보였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지 않고, 서로의 무릎에 앉지 않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끊임없이 해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내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수능시험 이후로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더니, 졸업식에도 오지 않았다. B는 수능을 망쳤고, A는 하향 지원한 대학에 가게 됐다는 소문만 들었다.


영화 후반부, 효신의 귀신이 학교에 씌인다. 효신의 귀신은 문을 쾅쾅 닫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화분을 떨어뜨리고, 공포에 휩싸인 학생들은 울며 이리저리 도망 다닌다.

이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영화에서 가장 짜치는 이 부분은, "널 한 번도 미워한 적 없는데 이젠 영원히 미워할 거야. 생일 축하해." 하는 시은의 말로 종료된다. 그동안 미처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은의 이 고백에, 중앙 현관문이 열리고 천장에 붙어있던 거대한 효신의 얼굴이 사라진다. 꼭 들어야 했던 말을 들은 것이다.


어쩌면 이건 모두 양호실에서 주운 교환 일기를 읽다가 잠든 민아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봄날, 내가 읽었던 그 편지는 단순한 장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좋아했던 내가 나도 모르게 편지를 읽는 순간 두 사람을 그런 관계로 정해버렸고, 평범한 친구였던 두 사람을 나만 음흉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아직도 부끄러운 것은 남의 편지를 훔쳐봤다는 것이고, 그 편지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가 <올드 보이>라는 것이다. 큰일이야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라고 생각했던 것은 결국 스스로의 위안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먼저 효신과 시은을 생각해야 했다. 최소한 이 사실을 퍼뜨리면 B는 자퇴하는 수밖에 없어, 라고 생각했어야 했다.


당시 나는 틈만 나면 쿨한 척했는데, 정작 그런 일을 목격하고 나니 촌스럽게도 바짝 긴장했던 것 같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봐서는 안 될 대단한 것을 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7년 뒤, SNS에서 우연히 A의 모습을 봤다. 외국에 사는 것 같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얼굴이 전혀 아니었다. 길에서 마주치면 분명 못 알아볼 것 같았다. 그러나 사진 속의 그는 아주 시원한 웃음을 짓고 있어서 나는 뭐야 별 것도 아니네, 하고 따라 웃었다.


https://youtu.be/fvOQDXYe8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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