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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un 20. 2021

일상으로의 초대

와니와 준하(김용균,2001)


여름이 싫다.

숨이 막히는 뜨거운 바람도, 땀이 줄줄 나는 습한 공기도 싫다. 바캉스랍시고 사람 바글바글한 곳으로 입에서 단내 나도록 운전해서 가고, 비싼 커피와 비싼 음식 먹고 사진 찍는 것도 싫다. 그리고 모기! 용신이든 지니든 누군가 오면 나는 꼭 모기를 멸종시켜 달라고 빌 것이다. 

그렇게 나는 벚꽃이 지는 순간부터 또 올 여름을 어떻게 버티나, 예민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맘때쯤 되면 예방 주사를 맞는다. 이 뜨거운 여름이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느껴질수 있도록 하는 나름의 감성 처방. 일단 시원한 곳에서 투게더를 퍼먹으며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를 읽고-올해는 <러프>를 읽었다-,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때 쯤 <와니와 준하>를 본다. 

일요일 오후에 마룻바닥에 앉아 선풍기를 틀어놓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브라운관 텔레비전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어 보면 가장 좋겠지만, 자취방에 누워서 노트북으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중학생 때 이 영화를 처음 보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춘천에서 동거중인 와니(김희선)와 준하(주진모)의 평화로운 일상. 퇴근길에 서로를 위한 담배와 딸기를 사서 약속하지 않고도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사랑하는 사이. 그래서 나중에 크면 꼭 좋아하는 여자와 한 집에 살아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삼십대 중반이 된 지금도 이 영화를 보며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늘어진 옷에 추리닝을 입고 산책하고, 함께 해물탕과 와인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그리고 김희선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나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


과거 와니와 사랑하는 사이였다가 외국으로 떠났던 의붓동생 영민(조승우)이 돌아온다는 전화에, 와니는 흔들린다. 때마침 영민을 짝사랑했던 동네 후배 소양(최강희)이 다시 나타나 와니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흔들리는 와니를 보며 준하는 고민한다.


나는 어렸을 때 소년만화 만큼이나 순정만화를 좋아해서, 토요일마다 한가득 빌려와 방에 누워서 읽곤 했다. 박희정과 박은아, 천계영의 만화는 아직도 본가의 내 방 책장 <상남2인조> 옆칸에 고이 모셔져 있다. 


출판 순정만화의 세계는 웹 소설이나 TV드라마와 다르다. 그 세계는 일상적이지만 화려하고, 평범한 장면만 나와도 느낌있는 컷만 등장하니 다이나믹하다. 분명 배경은 한국이고, 대부분 강북인데, 익숙한 지하철역과 동네가 나와도 내가 아는 그 느낌과 아주 다르다.


<와니와 준하>의 춘천도 그렇다. 와니와 준하는 오래된 주택에서 살며 오래된 동네를 걷는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익숙한 모습의 그런 동네지만, 묘하게 비일상적이다. 오래된 상을 펴고 앉아 커피를 마실 때도, 동네 어귀 포장마차에 앉아 있을 때도 이 조용한 공간은 반짝반짝 빛난다.


이 별 거 아닌 것을 별 것으로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나, 후줄근한 차림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두 배우의 화려한 외모 때문일까. 리사 오노의 목소리 때문일까. 삼십대 중반이 되어 혼자 살게 된 시간이 십오 년 가까이 되니 조금 알 것 같다. 이 영화는 줄곧 와니-가끔은 준하-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공간과 일상이 주는 안정감이 보이는 것이다.


날카로운 첫사랑의 기억과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동시에 남긴, 과거의 인물 영민의 그림자에서 와니는 결국 벗어난다. 영민과의 추억이 있던 집과 동네에, 지금은 준하가 살고 있다. 와니가 모르는 사이 준하는 이 집과 이 동네에 자신의 냄새를 잔뜩 묻혀둬, 어느새 영민을 밀어냈던 것이다. 지금 와니에게 필요한 것은 눈썹을 그려주던 영민이 아니라, 집에 늦게 들어오는 와니를 위해 TV 켜지는 시간을 예약해두는 준하였다. <내 이름은 김삼순>(MBC,2005) 속 대사처럼 추억은 추억일 뿐, 아무 힘도 없다.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가슴시린 추억이나 뜨거운 해프닝이 아닌 언제나 함께하는 밋밋한 일상.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영민이 가장 좋았다. 조승우가 연기하는 금기된 사랑에 빠진 혼란스러운 젊은 눈빛이 참 좋았다. 그 다음에는 외사랑 캐릭터 소양-최강희 최고의 연기라고 생각한다-이 좋더니, 최근에는 준하의 우직함이 끌리다가 이번에 다시 보니 와니의 표정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불안한 눈빛으로 달팽이를 보면 깜짝 놀라던 와니가 준하가 잠시 떠난 뒤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밥을 먹고, 달팽이를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모습이 남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단단해진 와니의 마음.


누군가는 김현철 때문에, 누군가는 욘사마 때문에 춘천을 마음 속에 품고 살겠지만, 나는 이 영화 때문에 춘천을 마음에 품고 산다. 그래서 내 마음 속 춘천은 언제나 여름이다. 영화 속 와니의 집이 사실 후암동에 있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 알았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가 됐다는데 일본인 관광객인 척, 아노 스미마셍, 하며 한번 가 볼까 싶다.


나란히 손을 잡고 매미 소리 가득한 골목을 걷는 와니와 준하의 모습이 오래 남는다. 자꾸 내 모습을 겹쳐 보게 된다. 결혼할 때가 됐나?



https://youtu.be/T_8o2oEt2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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