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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Aug 08. 2021

류승완의 오답노트

모가디슈(류승완,2021)


류승완이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 외교관들의 탈출 실화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런저런 쓸데없는 기대를 했다. 일부러 뉴스도 예고 영상도 찾아 보지 않았다. <베를린>(2013)처럼 다 때려부수는 영화겠지? 혹시 정두홍이 나와서 에유 더워 죽것네에, 하면서 소말리아 반군을 돌려차기로 제압하지는 않을까? 하다못해 마동석이 나와서 야 나 대한민국 외교관인데, 동네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어딜 도망가? 하며 오른팔 하나로 영사관을 지켜 주진 않을까. <폴리스 스토리>(1985)처럼 자동차 한 대로 모가디슈 판자촌을 뚫으면 좋겠다. 아 재미있겠다.


개봉 첫 날 영화를 보고 만족과 아쉬움이 반반 섞인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문득 생각했다. 맞아, 가장 최근 영화가 <군함도>(2017)였지.


아마 나는 류승완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관객일 것이다. 신작을 보고 나면 감독의 이전 영화 얘기나 해대는 그런 사람. 그러나 류승완 감독이 이 글을 볼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계속 쓰도록 한다.


<모가디슈>는 깔끔하다. 1991년의 실화를 다루면서도, 그 시절 유행가 한 번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오직 생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그곳을 탈출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북한 사람들을 합류시키는 과정에서 한 대사(김윤석)와 강 참사관(조인성)의 대립 장면도 길지 않다. 보통 낯간지러운 대사 한 마디쯤-민족이나 생명 등이 등장하는- 있을 법도 한데, 그마저도 없다. 개성 강한 조연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남북 사람들이 부딪히며 나올만한 코미디 장면도 없다. 감독도 답답했는지 남북 두 참사관의 짧은 몸싸움을 아주 화려하게 만들며 한숨 돌리는 느낌이다.


대신 남북 영사관 사람들이 탈출하는 장면의 액션에 집중한다. 관객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탈출하는 사람들의 자동차에 함께 올라타게 된다. 마치 정말 모가디슈 거리 한 복판에서 내가 탄 차로 총탄이 빗발쳐 들어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목적지인 이탈리아 영사관까지 반군의 추격을 받으며 달리는 꽤 긴 장면이 순식간에 지나갈 만큼 정교하고 화려하다.


목숨을 걸고 목적지에 도착한 뒤 맞은 마지막 위기에서도 한 대사는 (여태껏 사우스, 노스로 부르던 것과 달리) "위 아 코리안!" 한 마디만 외치고, 탈출에 성공한 뒤 아마도 영원할 이별의 장면에서도 남북 사람들은 서로 잠시 눈빛을 주고받고 가벼운 스킨십 후에 바로 등을 돌린다. 실화의 무게감이 크겠지만, 나는 류승완이 의도적으로 최대한 심플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류승완 특유의 맛깔나는 대사와 진짜 아파 보이는 맨몸 격투가 이 영화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철저할 만큼 덤덤하다. 나는 그게 많이 맞아본 자의 포커 페이스로 보였고, <군함도>로 류승완이 받았던 수많은 모욕을 떠올리며 왠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류승완이 '액션 키드'라고 불리지 않게 된 것, 그러니까 쿠엔틴 타란티노며 가이 리치며 하는 사람들과 비교당하지 않게 된 것은 <부당거래>(2010) 이후가 아닐까. 이 흠잡을 데 없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왠지 이 영화가 류승완이 그동안 받아온 수많은 오해와 비난-내용이 부실하다, 촌스럽다, 액션만 찍을 줄 안다, 어디서 본 것 같다-을 날리기 위한 한 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 내내 스트라이크 판정을 불리하게 받아 아웃당한 타자가 마지막 타석에서 이를 갈고 결국 홈런을 쳐내는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2013)이 맨몸 싸움이나 할 줄 알지, 007이나 본 시리즈 같은 영화는 못 만들 거라는 비난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면, <베테랑>(2015)은 <부당거래>를 보고 화가 난 경찰들을 위한, 혹은 전 연령 관객과의 '정당거래'를 위한 류승완의 제스처로 느껴진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풀어내니 결국 천만 관객이 사랑한 영화가 됐다.


내게 류승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전작에 대한 대답을 다음 영화로 내놓는 사람이다. 지독하게 부지런한 사람이다. 앞서 류승완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관객이 나일 것이라고 쓴 것은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모가디슈>가 <군함도>에 대한 오답 노트로 보인다. (<군함도>의 그 비 이성적 논란을 제외하면) 그가 만드는 영화는 점점 빈틈이 없어지고, 딱히 책 잡을 것이 없어진다. 마치 어릴 때 동네에서 친했던, 늘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던, 담벼락 밑에서 담배 나눠 피우던 껄렁한 형이, 나이를 먹어 점잖은 모습으로 돌아와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느이다. 식후땡? 하면 임마 무슨 애두 아니구, 하면서 넥타이를 고쳐맬 것만 같다.


그래서 <주먹이 운다>(2005)를 다시 꺼내 봤다. 다시 봐도 끝내줬다. 촌스러운 스포츠 신파면 어때, 이렇게 불처럼 뜨겁고 끈적끈적하게 온몸에 달라붙는 영화인데.


오랜만에 류승완이 연출하는 영화를 봐서 기쁘다. 만약에 사람들의 평에 맞서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노력을 감독이 정말로 하고 있다면,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오랜 팬의 개인적인 소망이다. 그러니까 빨리 말했던 것처럼 <베를린>과 <베테랑>의 속편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가장 보고싶은 것은 <다찌마와 리>의 새로운 이야기지만.



https://youtu.be/z9LiPuVRy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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