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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Aug 16. 2021

'어른의 연애'가 뭘까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변승욱,2006)


대학 시절 학과에 정년을 앞둔 교수님이 계셨다. 그 교수님은 늘 요즘 젊은 학생들 연애도 안 하고 결혼 생각도 없어 보여서 큰일이라며 진지하게 걱정하셨다. 본인은 한국전쟁 중에 태어났다며, 전쟁 중에도 사랑은 계속된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학생들에게 자주 훈화를 하셨다. 지금 당장 현실이 힘든 것 같아도,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결국 모든게 잘 된다고.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교수님은 옛날 분이고 엘리트셔서 '현실'과 '사랑'의 영역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시는군, 하고 속으로 건방을 떨었다.


그래서인지 (어린애들은 모르는)어른의 연애,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게 뭘까 생각하게 된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만나서 결혼식 올리기 전에 세 달쯤 하는게 어른의 연애일까? 비가 새는 작은 방에서 새우잠을 잔대도 함께 있으면 즐거운 게 어른의 연애일까?


서울 변두리에 정신지체를 가진 형을 돌보며 사는 동네 약사 인구(한석규)가 있다. 노모와 함께 장애인 형을 돌보느라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를 떠나 보냈다. 그 동네에 집안의 빚에 눌려 사는, 그래서 결혼하겠다는 여동생에게 뱃속의 아이를 지우라며 모진 소리를 하는 동대문 짝퉁 디자이너 혜란(김지수)가 이사 온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가쁜 숨이 새어나올 정도로, 무거운 것을 짊어진 두 사람은 여유가 없다. 결혼은 상상도 못하고 연애마저 쉽지 않다. 겨우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남의 옷을 베껴 파는 혜란은 단속을 당해 경찰서에 끌려 가고, 인구의 정신지체 형 인섭(이한위)의 돌출 행동은 끊이지 않는다. 그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각자의 '현실'로 돌아간다.


영화는 내내 우울하고 심심하게 흘러가며, 두 사람을 둘러싼 사건-각자의 가족들이 벌이는-은 뜬금없이 벌어진다. 혜란의 동생이 하는 말처럼, 너무나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다. 두 주연 배우도 왠지 다른 출연작들에 비해 밋밋해 보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1998)와 <여자, 정혜>(이윤기,2005)의 캐릭터를 조금씩 덜어 버무린 것 같다. 


그래도 영화는 소소한 희망을 주며 끝낸다. 어머니를 잃은 인구는 형과 함께 형이 좋아하던 등산을 한 뒤 혜란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혜란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인구에게 전화로 들려준다. 영화를 다시 보기 전에 기억나는 장면도 혜란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최근 다시 보고 나니 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혜란을 만나고 난 뒤, 인구가 거울을 보며 외모에 신경쓰는 장면. 혜란이 인구가 없는 약국에서 그의 가운을 입고 벽에 걸린 약사 면허증을 올려보는 장면. 어설픈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동네 언덕길을 나란히 걸어 올라가며 인구가 "돈 워리요, 비 해피요" 말하던 장면.


그 장면들을 보고 나니 이것들 때문에 이 밋밋했던 영화가 다시 보고 싶었구나, 싶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사람이 희망을 보는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영화 내내 조금씩 들어간 이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 결국 '현실'과 '사랑'의 영역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른의 연애'라는 것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연애인 것 같다. 고등학생들의 연애와 똑같이 유치하고 이기적이더라도, 지금의 좋은 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고, 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꼭 '보통의 연애' 형태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교수님의 말씀처럼 함께 한다고 결국 모든 것이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구와 혜란이 다시 만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진 않겠지. 그러나 관계의 결말과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돈 워리요, 비 해피요" 하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여섯 살에게도, 예순 살에게도, 투병 중에도, 전쟁 중에도 그런 순간은 필요하다.


https://youtu.be/f_IxA6dBy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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