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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Sep 04. 2021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염력>(연상호,2018) / <악질경찰>(이정범,2019)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두 개의 문>(김일란-홍지유,2011)이다. 감정 이입을 하기에는 <소수의견>(김성제,2015)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염력> 개봉 당시의 그 수많은 조롱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몇몇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내게 이 영화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참사를 막아내는 이야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래전 손을 놓았던 딸에 대한 죄책감과 갑자기 염력을 얻은 영웅 심리 때문에 초능력을 사용해서 철거민을 돕던 석헌(류승룡)이 진심으로 각성한 것은 경찰서에 끌려가 건설회사 홍 상무(정유미)와 만난 이후다. 홍 상무는 석헌에게 진짜 초능력은 대한민국 자체가 능력인 사람들의 것이라고, 당신이나 나나 모두 노예라고, 당신 딸은 구속돼서 그걸 배울 테니까 그 초능력으로 열심히 파지를 모아서 한번 잘 살아보라고 비웃는다.


그 말을 들은 석헌은 유치장 문을 부수고 하늘을 날아 용역 직원들과 경찰, 철거민이 섞인 전쟁터 한복판으로 날아가 딸 루미(심은경)를 구해낸다. 그가 하늘을 날았기 때문에 망루에 불이 붙지 않았고, 한 명의 경찰도 한 명의 철거민도 죽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석헌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구의 자전을 거꾸로 돌려서 시간을 돌린 뒤,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에서 구해내는 슈퍼맨을 떠올렸다. 석헌은 공중에 뜬 채 딸을 품에 안고 울먹인다. 아빠가 미안해.


연상호 감독이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심플하고 순수하다. 그날 그 옥상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뭐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때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서 짠 하고 사람을 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이 같은 바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지구를 거꾸로 돌려서, 2009년의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으로 가서, 누구도 죽지 않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슬픈 초능력 영화며, 갸륵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다.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용이 유치하다는 비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랑받은 영화 중 <염력>보다 유치하고 촌스러운 영화는 수없이 많지 않나?


그나저나 석헌 역할에는 흥행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임원희가 정말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이정범 감독의 <악질경찰> 예고편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벨 페라라 감독의 <악질경찰>(1992) 속 하비 카이텔과 비슷한 역할을 이선균이 하나 본데, 이번엔 짜증을 얼마나 내려나. 설마 또 우는 건 아니겠지?


영화를 보고 난 뒤 생각난 배우는 하비 카이텔이 아니라 설경구였다.

 <공공의 적>(강우석,2002)의 강철중.


<악질경찰>의 이야기는 딱히 새롭지 않다. 필호(이선균)는 내내 인상을 쓰거나 썩소를 짓고,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하고 폭력을 쓰는 전형적인 직업윤리 제로의 배드 캅. 그가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소녀 미나(전소니)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는 것도 딱히 새롭지 않다. 소녀가 세상을 등진 이유가 세월호 참사라는 점을 빼면.


세월호 참사 직후,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서울시청 앞 분향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조문객의 수를 세고, 안내하고, 국화꽃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평일 낮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넥타이를 맨 늙수그레한 아저씨들이 수없이 찾아왔다. 하나같이 쓸쓸하고 참담한 표정인데,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필호는 결국 미나를 지키지 못한다. 그리고 미나의 죽음으로 필호는 아주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기계공고 다닐 때 컨닝해서 꼴등에서 두 번째 한' 강철중조차, 그의 동네에 살던 똥쟁이 종수조차 아는 사실. 사람이 이렇게 막 죽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이 비정한 느와르 월드에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나 염력 같은 초능력은 없다는 것. 아마 서울시청 앞 분향소에 왔던 아저씨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필호는 복수한다. 그는 악질경찰이니까.


복수를 마치고 경찰차 뒷좌석에 실려 창 밖을 바라보던 필호는, 아이답게 웃으며 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미나의 모습을 본다. 영화 내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인상을 쓰고 썩소를 짓던 둘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필호는 기쁨에 겨워 미나에게 외친다. 너 잘 지내지? 거기서 잘 지내야 해!


이정범 감독의 전작 <아저씨>(2010)에서 가족을 잃고 어둠 속에 숨어 살아가던 태식(원빈)은 유일한 친구인 옆집 꼬마 소미(김새론)를 죽음에서 구함으로써 고통뿐인 삶에서 구원받는다.


<악질경찰>의 미나는 처참하게 죽는다. 그래서 필호가 미나의 복수를 하는 것은 태식이 소미를 구하는 것과 다르다. 내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똥쟁이 종수보다 못한 인간들에 대한 복수다. 그리하여 결국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미나와, 그것을 무력하게 보고만 있던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미나의 웃음을 보고 필호는 그토록 반가워하는 것이다.


<염력>과 <악질경찰>은 슬픔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영화다. 그래서 두 영화 모두 주인공들이 웃는 얼굴로 끝난다. 출옥한 석현은 다시 치킨집을 운영하는 루미에게 돌아가고, 필호는 미나와 친구들이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참 슬픈 영화들이다. 슈퍼맨이 지구를 거꾸로 돌리지 않는 한, 둘 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https://youtu.be/0n4ULyogK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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