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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Dec 29. 2020

이것은 농구 이야기가 아니다

나바호 바스켓볼 다이어리(Netflix,2019)

 

나의 아버지는 젊었을 적 유도 선수였는데,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재미있다. 중학생 시절, 체육 선생님이 유도를 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바로 입부했다고 한다. 사실 70년대 농촌에서, 도시락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농가의 여섯 번째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시골에 남아 농사를 짓느냐, 어떻게든 자력으로 이곳을 떠나느냐 둘 뿐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누나들에 비해서는 선택지가 나은 편이었다.


2018년 애리조나 나바호 원주민 보호구역, 친리 지역 소년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고등학교 농구팀 ‘친리 와일드캣츠’가 유일한 스포츠 팀인 이 황량한 지역에서 소년들의 선택지 역시 둘 중 하나다. 농구를 통해 지역 밖으로 나가는 것, 아니면 초등학생마저 마약을 파는 이 동네에 남는 것. 이 다큐멘터리는 전자를 선택한 소년들이 주 대회 우승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떤 컨텐츠보다도-<더 라스트 댄스>(넷플릭스,2020)보다도 더!- 농구 경기 장면을 매력적으로 담았지만, 사실 이것은 농구 이야기가 아니다.


지역의 유일한 스포츠 팀, 와일드캣츠는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로컬 스포츠팀이 지역민에게 팀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FC 바르셀로나와 80년대 해태 타이거즈가 그랬듯이-는 많지만 이곳은 조금 다르다. 친리 사람들에게 농구는 소년들이 보호구역 밖으로 진출해서 성장한 뒤, 다시 마을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 구성원의 육성 수단이다-이 다큐멘터리의 원제는 <BASKETBALL OR NOTHING>이다-. 그래서 와일드캣츠의 경기는 다른 고교 스포츠 이야기보다 더 절박하고, 덜 낭만적이다.


만화 <슬램덩크>(타케히코 이노우에,1990)는 불량학생 강백호가 ‘바스켓맨’이 되어가는 성장담이다. <H2>(아다치 미츠루,1992)의 천재 투수 히로는 첫사랑을 위해 공을 던진다. 그러나 와일드캣츠에 스포츠맨으로서의 성장, 소년의 첫사랑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와일드캣츠 소년들은 자신의 전공인 기계공학을 대학에서도 공부하고 싶어서, 혹은 ‘훌륭한 어른’이 되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농구를 한다. 새벽에 일어나 물을 길으러 가고, 말을 타고 가축을 돌보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농구 경기 장면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감독의 라커룸 스피치다. 경기가 끝난 뒤 그가 하는 말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마음가짐, 두려움에 맞서는 법, 패배에 자책하지 않는 방법들이다. 우리는 가족이며, 뭐든 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스포츠 팀 감독이 아닌 교육자로서의 말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농구 이야기가 아니다.


시리즈의 승부처는 마지막 화, 졸업반 학생들의 진로가 결정되는 장면이다. 

6개의 에피소드로 와일드캣츠의 경기를 보며 결국 진심으로 소년들을 응원하게 된 나는, 졸업식 장면에서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대학 진학이 결정된 뒤 졸업식에서 소년은 그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나 농구에 대한 집념 따위는 아무것도 없는 순수하게 기쁜, 아주 소년다운 얼굴이었다. 내게는 소년들이 부족의 미래를 짊어진 이들이 아니라, 나이키와 NBA를 좋아하는 평범한 10대 소년들로 보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쯤에서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어서 해야겠다. 유도 선수로 대학에 진학하며 상경한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 40년째 유도와 전혀 관련없는 일을 하며 타향살이 중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을 발전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대학 졸업 이후,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지낸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간 소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든, 그렇지 않든간에 행복하기를 바란다. 어른이 되어 보호구역 밖에서 벌어질 수많은 경기에서 매번 이기지 못한다 해도, 다시 마을로 돌아와 지역 사람들의 성원에 보답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싶다. 


https://youtu.be/qStGe_i_p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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