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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Dec 09. 2020

초희,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소리도 없이(홍의정,2020)

 

1. 초희(문승아)는 첫 등장에서 기묘한 토끼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감독의 말처럼 <별주부전>에서 따온 설정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 초희는 납치당하기 전에도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남동생만을 예뻐하는 아빠-엄마는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으며, 결국 초희를 일상의 세계로 돌려보내 주는 사람은 초희의 학교 선생님이다-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귀여운 토끼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열 살 소녀의 겉모습을 하고, 실제로는 모든 상황을 계산하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래서 초희의 토끼 가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2. 태인(유아인)은 스스로 무엇인가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창복(유재명)이 지시하면, 그는 툴툴대지만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모든 지시를 수행한다. 낑낑대며 시신의 머리를 북쪽으로 돌리고, 밤에는 성경 테이프를 듣는다. 어린 소녀를 집에 들였다가 '가든'으로 보낸다.

그러나 초희는 태인이 하지 않는 일들을 한다. 어린 문주(이가은)에게 생활 규범을 가르치고,

산처럼 쌓인 빨래를 하며, 어두운 밤, 화장실에 갈 때는 태인에게 동행을 요청한다.


초희는 마지막 순간, 태인이 누구냐고 묻는 선생님의 말에 아마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말했을 것이다.

황망한 표정으로 옷을 벗어던지고 달아나며 태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도 초희처럼, 창복을 유괴범이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을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를 읊조리고 있었을까.

그 장면에서 나는 어린 태인이 어두운 밤, 화장실에 혼자 가기 무서워 결국 바지를 적시고, 그를 본 창복이 태인의 바지를 벗겨 아무렇게나 방 구석에 내던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던져진 태인과 문주의 옷이 방 안에 가득 쌓이는 장면을.

     

3. 범죄 현장 시신 처리를 하는 창복은 성실한 '을'이며 노동자다. '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면서도, 시신을 매장할 때는 나름 풍수도 고려하고 종교 절차도 진행한다.

그러나 태인과의 관계에서 창복은 '갑'으로 변모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식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떼이고 떼인 일삯에서 또 한참이나 떼어서 태인에게 건넨다.

이 영화 속 '아버지'들의 모습은 한결같다. 자식에게 돈을 주지 않아 죽음으로 내몰거나, 악덕 고용주가 되어 자식을 착취한다.


4. 아이를 납치하고 약물을 먹여 어딘가에 팔아먹는 극악한 상황이지만 실행자들의 대화는 마치 거래처에 볼펜을 납품하는 현장처럼 평이하다. 그들은 보통의 노동자처럼 서로에게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뒤틀린 '업무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대화를 통해 해결점을 찾는다. 서로 조금이라도 덜 귀찮은 일을 하려고 머리 싸움도 벌인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실장은 말을 못(안) 하는 태인을 위해 자신의 입술을 읽을 수 있게 배려하며 격려를 건네고, 용돈도 준다. 누가 봐도 변태처럼 등장하는, 그래서 초희가 보자마자 달아난 할아버지는 알고 보니 경찰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자신이 악인임을 깨달은 태인의 표정은 공허하다.


5. 이전의 생활로 돌아간 초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문주에게 주고 온 토끼 가면 대신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 문승아 배우의 눈빛 연기가 오래 남았다.  



https://youtu.be/RQorl6DeA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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