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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Feb 26. 2019

당신이 읽지 않은 책

미리 쓰는 작가의 말



하기 싫어도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 불편한 감정과 느낌을 피해 늘 도망 다녔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피해 다닐수록 그 감각은 더욱 뚜렷하고 교묘하게 나를 찾아왔다. 내 안에서 또렷이 느껴질수록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느낌이 싫어서 괜히 미드 시즌 1부터 5까지 다시 정주행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일부러 시끄럽고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찾아다녔다. 다른 것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모른 척하고 싶었던 불편한 그것들이 눈 녹듯 사르르 사라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 홀로 있을 때는 다시 슬그머니 내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나를 놀리는 것처럼. 그러면 나는 또 그 감정과 마주하기 싫어서 다른 자극을 찾았다.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밖을 돌아다니거나, 하루 종일 핸드폰으로 쇼핑을 했다. 귓가가 간지러운 유튜브 먹방을 실컷 봤다. 그런 하루의 끝에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내가 뭘 한지도 모르겠지만, 뭘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직면하지 못한 생각과 감정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마치 읽기 싫어 다락에 처박아 둔 많은 책처럼.


오래 방치한 책들은 누렇게 빛이 바래고 삭아갔다. 누군가들은 그 책들을 ‘과거’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후회’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상처’ 혹은 ‘미련’이라고 불렀다. 저마다 그런 책을 수백 권씩은 껴안고 있다고 했다. 그 책은 내다 버릴 수도, 불태워 없앨 수도 없다고 했다. 다들 애써봤지만 책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건드릴수록 점점 더 늘어난다고 했다. 읽지도 못하고 너덜너덜한 책을 마음 한 구석에 박아두고 사는 일, 그 무게를 견디는 일, 다들 입을 모아 그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있을지 몰라 무서워서 펼쳐보지도 못하고 저 멀리 밀어두었지만, 적어도 한 번은 펼쳐보고 싶다는 열망이 두려움 속에 아주 작게 고개를 내밀었다. 싹 다 내다 버릴 수도 불태울 수도 없는 책이라면, 차라리 실컷 펼쳐보고 싶었다. 마음속에 책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더 늘어나 깔리기 직전의 상태였다. 까딱하면 이 무게에 깔려 죽겠다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법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살기 위해서.

     

세상에는 책을 다루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누군가는 '버릴 수 없는 책은 없다'라고 주장했고, 누군가는 '책은 그저 끌어안고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며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방법들에 곧잘 빠지기도 했지만, 곧 나는 그들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음속의 무거운 책더미를 끌어안고, 힘들게 오랜 시간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읽는 법을 알려주는 스승을 만났다. 책을 어떻게 마음속에서 치워버릴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책을 읽는 순간, 책은 마법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냥 그게 다였다. 어느 책은 펼쳐 든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어느 책은 읽는 도중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한 번에 열댓 권씩 같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한숨이 나왔다. 기쁨과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고,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안타까움의 한숨이기도 했다. 내 몸과 마음은 너무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은 내 안의 책을 꺼내 함께 읽어주었다. 읽기를 마친 책은 스승의 손에서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몇 백권이나 되는 책을 죄다 읽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스승은 내게 부드럽게 말했다. '너의 책은 네가 읽을 수 있단다, 그게 인생이란다.' 나는 그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읽어야 할 책은 아직도 너무나 많았고 나는 이제야 겨우 손끝으로 더듬어 글씨를 읽어 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천천히.


마음의 서재는 늘 어둡다. 그래서 들여다보는 것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불을 밝히고 조심스레 내려가면 아직도 서가에는 무수한 책들이 빽빽이 꽂혀있다. 왜 나는 이렇게 많은 책들이 있는 걸까? '상처''후회''미련''두려움'따위의 제목이 표지에 쓰여있는 책들을 용기 내어 겨우 펼치면, 제목과 내용이 전혀 달랐다. 내 마음대로 제목을 붙여놓은 거였다. 시간이 흐르자 가만히 알게 되었다. 이 책들은 결국 내가 마음으로 써 내려간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내가 읽어야만 한다는 것을.


지금 집필하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일까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많이 가졌다. 하루 종일 빛이 잘 들지 않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토닥거리면서, 나는 그러니까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오늘 답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 수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지만 도무지 어떻게 읽는지를 몰라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마음의 서재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의 제목을 바로 잡고, 용기를 내어 한 페이지를 펼쳐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책이다. 아직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렇게 작가의 말을 미리 쓴다.


좋은 그런 책을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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