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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r 07. 2019

소설 쓰고 앉아있네

두 달간의 소설 쓰기

월간 윤종신


지금이야 음악도 하고 예능도 하고 연기도 하는 '연예인' 윤종신을 모르는 사람이 잘 없을 테지만, 나는 '가수' 윤종신의 오랜 팬이다. 윤종신의 전 앨범을 다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카세트테이프 몇 개와 상반신 누드가 실린 - 아무리 팬이라도 이건 좀 - LP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 다했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나의 오랜 꿈은 윤종신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한 주에 한 번 보는 성당 오빠의 평범한 인사에도 괜히 마음이 설레, 밤새 이불 킥을 하며 이불깃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이불깃 맛이 꽤 짭짤합니다) 열여섯 살. 하물며 매일매일 듣는 목소리의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재간이 있겠나. 당시 윤종신은 인기도 인지도도 없었으니, 그가 앞으로도 꾸준히 인기가 없고 - 써놓고 보니 몹쓸 팬이네요.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인기 없는 가수를 향한 내 연정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방에 살아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게 내 사랑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만, 어른이 되면 무조건 서울로 올라가서 승부(?)를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윤종신이 결혼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고 - 윤종신 씨도 나의 존재를 꿈에도 몰랐겠지만 - 심지어 자기보다 키가 큰 테니스 선수와 결혼했으니, 이미 나는 키에서 지고 들어갔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앞길을 축복했다. 키뿐만이겠냐만.


휘성도 아니고 갑자기 '결혼까지 생각했어' 라며 윤종신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월간 윤종신> 때문이다. 그는 2010년 3월부터 여러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매월 한 달에 한 곡, 혹은 그 이상을 꾸준히 발표해오고 있다. 매월 다양한 콘셉트의 음악을,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작업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울까. 마감하기가 무섭게 다음 달 기획회의를 하고, 인쇄소에 파일을 넘기기 직전까지 팀원들과 교정지를 돌려보며 밤을 새우던 시간의 한토막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 오랜 팬으로서의 애정과 더불어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동질감은 최근 두 달의 경험으로 인해 존경심으로 바뀌었다.


다들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발단은 이러했다. 새해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겼다. 반년 전부터 말은 있었지만,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던 일이다.


"그래도 제가 쓴 글 정도는 보고 나서 결정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네 글 쓰는 사람이라며. 아, 괜찮아. 괜찮아. 진행하지."

"그래도 그게... 그게 아닌 거 같은데."


누군가가 나를 믿는다. 그것도 덜컥 믿는다. 근거 없는 믿음의 무게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당장 책 한 권을 써야 한다고? 내가? 왜? 정말? 머리를 북북 긁는 내게, 짝꿍이 제안했다.

"작업하면서 글쓰기 강의를 본격적으로 한번 들어보는 게 어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거 좋은 생각이다!단순 이론서인 줄 알고 작업을 덜컥 맡긴 했는데, 내게 근거 없는 믿음의 무게를 체감케 한 주인공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다. 마침 기획안과 샘플원고를 컨펌받고 난 직후였고, 피드백이 영 시원찮아 방향부터 다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라 짝꿍의 제안에 귀가 팔랑거렸다. 어떻게 써야 할까.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격언이, 들끓는 튀김 솥에 톡 떨어뜨린 튀김옷 한 방울처럼 생각의 표면 위로 퐁- 산뜻하게 솟아올랐다. 맛이 없어 부러? 그라믄 튀겨야제...


홍시에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말씀드린 것이 온데...'A는 그러니까 A입니다' 하는 단순 이론서 대신, A에 이야기라는 튀김옷을 얇게 입혀보기로 했다. 이야기라면 소설이겠지? 그간 소설을 몇 편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읽은 소설이라 해도 기억에 남는 소설이 없었다. 그저 책장을 덮으면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이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감자를 튀기면 감자튀김이 되고, 180도 오븐에 초코 반죽을 구우면 초코 머핀이 되는 요리책의 공정을 사랑했다. 가장 애호하는 책이 요리책이라 소설이 뭔지도 잘 몰랐다. 요리 소설이라면 혹시 또 몰라도. 소설 강의 몇 개를 검색했고, '인기강좌'라는 태그가 깜빡였고, 접수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접수가 마감되었고, 아 이번 생은 소설과 연이 없나 보다 좌절했고, 강의 시작 하루 전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만세를 부르며 등록했다.


강의 첫날. 모범생 기질이 발동해, 30분 일찍 가서 맨 앞줄에 앉아 새 노트를 쫘악 펴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탑재했다. 강사는 소설가였다. 소설가라는 사람을 처음 봤다. 그리고 그가 강의를 시작한 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을 때쯤 알았다. 아, 내가 써야 되는 게 소설이 아니었구나. 이건 마치 빵을 만들어야 하는데- 게다가 시간도 별로 없다- 떡집에 가서 쌀 고르는 법부터 듣고 있는 격이었다. 아니, 자기가 만들어야 되는 게 빵인지 떡인지, 좀 더럽게 말하면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러분, 네 맞습니다. 저는 꼭 찍어 먹어 봐야 아는 사람이고요, 일단 손에 뭐라도 쥐고 주물럭거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게 빵 반죽인지는 떡집에서 찜기에 쪄보고 알았네요. 데헷.


환불할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눈밑이 퀴퀴하고 강의실 규모와 참석 인원수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큰 강사의 열정을 환불하기에는 어쩐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이 더 컸을 수도 있다. 나는 세계를 오로지 몸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이 있다. 몸으로 무언가를 짓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사람. 그래서 윤종신을 오래 좋아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는 소설가다. 하루 종일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몸으로 무언가를 짓고 몸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나도 물론 글을 쓴다고는 하지만 안전한 시스템 안에 있다. 시스템의 이름에 내 개인의 이름이 가리운다. 흡족할 문장을 쓰든 그저 그런 문장을 쓰든 그건 나라는 인의 일이다. 그렇지만 몸으로 무언가를 짓는 사람들은 개인의 이름에 인생을 건다. 개인의 인생으로 빵을 만들고, 음식을 내고, 글을 짓고, 노래를 만든다. 이것은 책임의 무게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날 선 결연함이 있다.


소설 강의에서는 여러 편의 소설을 가지고 뜯어보는 작업을 했다. 수요일 저녁, 늦은 밤까지 소설에 코를 파묻고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안 좋고...'라는 설명을 들으면 그제야 '아' 했다. 소설 읽는 법을 모르니 소설의 뜻도 모르는 게 당연했구나. 그제야 조금씩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하였다'와 '했다' 사이에서, '사람들'과 '사람' 사이에서,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대단하다면 대단한 이런 것들 사이에 코를 처박고 있으면, 다들 무슨 마음으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강의실을 한번 쓱 둘러봤다. 나야 똥인지 된장인지 몰라서 이랬다치고, 다들 무슨 마음으로 이러고 있을까.


소설 쓰고 앉아있네



이 강의의 백미라면 백미는 바로 소설을 한편씩 써낸다는 것. 그리고 그 소설을 다들 돌려가며 돌려 까기... 아니 '합평'한다는 것이다. 첫 시간에 제비뽑기로 소설 발표의 순서를 정했고, 자기 순서가 가까워오면 수강생들은 하나둘 결석하기 시작했다. 뽑기 운이 좋은 편이라 나는 '안전한' 강의 후반이었지만 안전하다고 생각한 강의 후반이 바로 다음 주가 되었고, 두 달간 다섯 장 밖에 쓰질 못했다. 이제 내가 결석할 차례인가.


수강생 중에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등단을 꿈꾸는 작가 지망생도 있고,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도 있고, 친구 손을 꼭 잡고 온 중년의 여자분도 있고, 2002년 생이라는 고등학생도 있다. 다들 수요일 저녁마다 소설을 한편 발표하기 위해서, 혹은 남의 소설을 읽고 난 소감을 말하기 위해서 모인다. 나는 합평이라는 걸 처음 해봤다. 나를 향한 여명의 눈동자를 애써 부정하며 '이 부분은 이래서 아쉬웠고... 과연 등장인물이 여기서 이래야 하는가?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라는 소리를 주절주절 거리고 나면, '니 놈은 얼마나 잘 쓰나 두고 보자'라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물론 마음이 저 푸른 바다처럼 가늠할 수 없이 넓은 상대방이런 생각을 했을 리 없다. 이건 순전히 딱 된장 종지만한 크기를 가진 내 마음의 소리다.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소설에 날아와 꽂힐 비수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어제는 두 번째 합평이 있었다. 여러 군데 지적을 받은 당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가 급기야는 딱딱하게 굳어, 강사가 그분 표정을 살피다 그만 합평을 종료했다. 아무튼 합평이란 그런 것입디다. 여러분.


소설을 쓰라는 명을 받았을 때, 처음 생각한 소설은 이렇다. 나중에 써먹을 소재일 수도 있지만, 내가 소설가가 될 확률은 지극히 낮으므로 여기에 공개한다. 버스를 탔는데 마침 버스기사 아저씨가 옆 차선 승용차와 시비가 붙는다. 제대로 열 뻗친 아저씨는 승객들을 다 쏟아버리고 승용차와 미친 추격전을 시작한다. 물론 나는 내리지 않는다. 그래야 소설을 전개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리고에서 이야기를 더 이상 전개하지 못해서 막혔다. 그래서 몇 주를 고심하다-딴짓했습니다- 새로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소설 쓰는 재능이 없다면, 주변의 가장 소설스러운 인물의 이야기를 그냥 종이에 풀어놓기로 하자. 내가 알기에 정말 기이하기로 손에 꼽는 선배가 문득 생각났다. 오죽하면 별명도 외계인이다. 그 선배의 인상착의와 인생역로를 그저 옮기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문제가 또 발생했다.


제출해야 하는 분량은 10페이지인데, 5페이지까지 쓰고 나니 쓸 말이 없었다. 그 뒤부터 선배와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연락이 끊긴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선배, 요즘 뭐하고 지내요? 지난 10년간 브리핑 좀 해봐요.'라는 다분한 의도가 담긴 메시지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 물론 연락처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10년전 진즉 바뀐 내 전화번호가 바뀐줄 몰라 고생했다며, 카톡으로 청첩장을 보내오는 이들이 참 놀랍기도 하다.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지?-. 그래서 내 소설은 움직일 듯 말 듯 하다가 끝내 밀어도 밀어도 꿈쩍없는 흔들바위처럼, 5페이지에서 도무지 진도를 못 나가고 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그럴 리 없겠지만 선배가 있다거나 선배를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지난 10년간의 인생사를 A4 딱 5 페이지로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딱 5 페이지면 됩니다. 제가 다음 주 수요일에 발표가 있어서요. 그리고 윤종신 씨, 언제나 사랑 아니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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