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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y 17. 2019

리틀 포레스트는 가짜다

짝짝이 양말과 편백나무 숲 오천 평

지난 주말 패션은 유니클로 잠옷바지에 고무장화


늦었다.


건조대에 걸려있던 양말도 씨가 말랐다. 꽤 오랫동안 빨래를 미뤘어도 양말 한 켤레쯤은 끝까지 남아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거늘,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텅 빈 건조대가 오늘따라 서글프다. 서랍을 마구 뒤지니 다행히 색이 같은 양말 한 켤레가 보인다. 한쪽은 레이스 스타킹, 한쪽은 발목양말이다. 부디 오늘은 신발 벗는 일이 없기를. 눈을 찌르던 앞머리는 어느새 코 끝을 덮어서 자꾸만 옆으로 걷어내다 보니, 거울을 들여다보면 청학동 어딘가에 살고 있을 서생마냥, 오대오 쪽머리를 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본다. 지난주에 미용실을 갔어야 했는데.


'아, 왜 이렇게 사는 거냐.'

출근길에 신을 양말 하나도 마련하지 못한 과거의 나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먼 북소리처럼 둥둥 울린다. 세탁기에 빨래가 저렇게 쌓일 때까지 무얼 했는지, 뭘 먹었기에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탑을 쌓고 있는지, 정리한다던 겨울옷은 대체 언제 정리할 건지 아무리 물어도 과거의 나는 답이 없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주인없는 이름이여!' 북소리에 장단을 맞추려다 다시 얼른 고개를 저었다. 마주한 오늘은 과거에 최선을 다한 결과일 테니, 더 이상 어쩌고저쩌고 하지 말자. 다행히 하루 종일 신발 벗을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퇴근한 나는 세탁기를 세 번 돌리고 설거지를 40분 동안 했다.



"언제 한번 놀러 와요."

 

저 멀리 있는 '언제'를 눈앞으로 턱 데려다 놓는 건, 인사치레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믿음일까, 아니면 아무 고민 없이 전라도행 버스를 잡아타는 실천력일까. 봄이 오면 두릅 캐러 오라는, 스쳐 지나는 말을 뒤늦게 붙잡았다. 양말 빨래와 설거지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흘러 봄에 나는 연한 두릅은 이미 저문 지 오래고, 나무에 붙어있는 두릅이 기세 등등한 푸른빛을 자랑할 때. 전라도 산골에 혼자 살고 있다는 그녀가 자랑하던 편백나무 숲 오천 평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디론가 좀 떠나고 싶었다. 답답했던 것 같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는 기대감이 바람 빵빵한 풍선처럼 둥실 부풀었지만, 버스에 몸을 실은 지 한 시간도 채 안되어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동행한 선생님은 끝없이 아들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차창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맹렬하게 퍼붓는 햇살을 가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고, 희한하게 시내버스는 좋아하면서 고속버스는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앞의 이유들과 더불어 금세 피로해졌다. 그렇게 네 시간 삼십 분을 달렸다.


편백나무 숲 오천 평의 주인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바다도 보고, 회도 먹고, 새소리에 깨어나고 - 정확히는 새, 개, 소, 닭과 우렁차게 코 고는 소리 - 고요한 마을도 한 바퀴 빙 돌았다. 곳곳에 양파와 파, 민들레, 보리 같은 것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물론 도시에서 나고 자란 까막눈인 내가 이런 것들을 알 턱이 없고, 선생님이 알려주셔서 알았다. 어느 들판을 지나면서는 선생님이 "보리 익어 가는 냄새다!"하고 감탄하셨는데, 나는 내심 손에 들고 있던 맥콜 캔이 냄새의 근원지라고 믿었다. (재차 보리 익어가는 냄새를 강조하시기에, 맥콜 향이라고 얘기했다가 등짝을 맞을뻔했다.)


두릅이 어디에 있을까요

밥을 먹고는 두릅을 구하러 산에 올랐는데, 그냥 '풀' 사이에서 어떻게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구분하는지 놀랄 따름이었고, 함께 간 선생님과 편백나무 숲 주인의 능숙한 손놀림을 몇 차례 따라 하다 질겁해버렸다.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햇살을 퉁겨내는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온통 초록인 것들 사이에 앉아, 햇살 받은 물결처럼 출렁이는 나뭇잎을 보면서, 적막 속에서 툭-툭- 나무 꺾는소리, 낫으로 치는 소리를 들었다. 요즘 젊은애들은 혼자 저러고 잘 있더라, 두 분이 나무를 꺾으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영화 <리틀 포레스트>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살고 싶다였나 뭐였나, 아무튼 그때 내가 한 말은 딱 한마디다.

"리틀 포레스트는 가짜야. 왠 줄 아냐? 주인공이 설거지를 한 번도 안 하거든."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볼멘소리로 '영화에서 굳이 그런 거까지 보여줘야 될 필요가 있느냐'며 항의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렇게 음식을 많이 만들면서 어떻게 설거지 한 번을 안 하나. 음식 한 가지만 만들어도 닦아야 할 냄비며 접시가 몇 갠데. 이상, 출근길에 양말이 없어 서러운 자취생의 항변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산 초입에서 더는 오르지도 못하고, 산의 기세에 눌려 하염없이 쭈그려 앉아있던 나는 저 멀리 편백나무 숲이 그려내는 스카이라인만 바라보았다. 광고에서 보던 것처럼, 피톤치트 가득한 아름다운 숲을 잠깐 상상했건만 현실은 역시 현실. 다시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출발 직전의 버스를 놓쳐 정류장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고,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너무 많은 간식을 먹어 배앓이에 시달렸고, 산의 흙과 땀이 묻은 빨랫감이 또 생겼다. 전라도에 다녀온 다음날, 몇 시간 못 자고 채 덜 마른 양말을 신고 출근했다. 웬일인지 피곤하지 않았다. 잠깐 듣고 온 파도소리와 눈에 담은 푸른색 덕분이었을까.


로맨틱은 어디에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설거지를 지워버리고, 편백나무 숲 오천 평에서는 허벅지를 파고드는 무수한 나무 가시를 치워버리고, 매일 쌓이는 빨래와 짝짝이 양말을 모른척하면 비로소 그곳에 로맨틱이 있다.


나는 삶을 살지만 로맨틱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삶을 살기에 로맨틱만 주구장창 읊을 수도 없다. 거 참 어렵구나, 싶으면서도 가뿐한 내 몸과 맘을 보니 로맨틱은 짝짝이 양말과 편백나무 숲 오천 평 그 사이 어디쯤에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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