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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May 19. 2019

작가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하여 글을 올리나



책 속엔 책이 너무도 많아서


중고서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워낙 책을 많이 사다 보니 - 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입니다- 책 구매에 드는 비용이 만만찮은데, 그렇다고 읽고 싶은 책을 안 사기에는 술도, 담배도, 커피도, TV도, 네일도, 인스턴트도 안 하는데 이마저 포기한다면 너무 각박한 삶이 아닌가 싶어 되도록 중고서점을 먼저 살펴보는 편이다. 여기저기에 산재한 중고서점을 뒤지고 다니는 탓에, 새 책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교통비로 지불한다는 문제가 발생하지만.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비용에 포함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지출이다.


원하는 책이 꽂힌 서가를 뒤지다 보면 당연히 찾는 책과 비슷한 다른 책들도 눈에 들어와, 꼭 두어 권을 더 사게 된다. 확실히 배꼽이 배보다 크다. 뽈록 튀어나온 이 배도 사실은 배꼽이 아닐까. 서가에 꽂혀있는 그 많은 책을 보면서 놀라는 사실은 상당한 책이 꽤 괜찮다는 것과, 이렇게 괜찮은 책이 출간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과 큰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 역시 이렇게 많은 책들 사이에 내 이름으로 된 한 권을 꽂아 넣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거참.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장롱 하나 크기 정도의 서가가 있었다. 평생 책 한 권도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함없는 행보를 이어갈 것인 아버지와는 달리, 유난히 책을 좋아하던 어머니의 것이었다. 어렵고 복잡한 어머니의 책 중에서도 <가우디의 바다>는 내가 읽을만해 즐겨 읽었고, 러시아 사회주의 작가인 '막심 고리끼'도 어머니의 서재 덕분에 알게 되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처음 읽은 건 아마 초등학교 3, 4학년 때였는데 겨우겨우 읽고 나서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지는 당최 알 길이 없었고, 그 뒤로 성인이 될 때까지 고전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늘 책을 보던 어머니의 모습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책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유전자가 나에게만 몰빵 된 것인지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다. (남동생은 책을 싫어한다.)


어머니의 서가는 어린 내가 탐내던 보물 1호였는데,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네가 어른이 되면 이 책을 다 물려줄 거야."라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얼른 어른이 되어 어머니의 책을 다 물려받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어머니의 취향은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한 번은 내가 읽다가 눈물 콧물을 쏙 뺀 책 한 권을 극찬하며 집으로 보내드렸는데, 어머니가 다 읽고는 '어느 부분이...?'라는 건조한 다섯 자 감상평을 보내왔다. '트렌드가 거기서 거기지.' 하고 시큰둥한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해마다 발표되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과 <트렌드 코리아>를 (내 돈으로) 사서 읽는다. 나는 이상문학상이 읽어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뭣도 모를 때는 정말 이상해서 '이상' 문학상인 줄로만 알았다. 덧붙이자면 <주홍글씨>는 성은 주요, 이름은 홍 글인 사람에 대한 일대기로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도.)


어머니의 서가를 물려받고 싶어 하던 나의 꿈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의 어느 누군가는 하루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며 서평으로 돈을 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평생을 쉼 없이 읽어대도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0.01%는 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루에도 여기저기서 수천, 수만 권의 책이 쏟아진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작은 규모의 중고서점만 가도 정말로 많은 책이 있다. 그 많은 책은 누가 읽는 걸까. 내 주변만 봐도 책 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친구에게 재미있다며 작년 봄에 추천한 소설은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읽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다. 지하철을 타면 가뭄에 콩 나듯이 한 칸에 한 명정도가 책을 들고 있다. 물론 핸드폰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어쨌거나 눈에 보이는 독서량은 현저히 적은데 책을 쓰는 사람은 많다. 몇 해전에 회사 업무로 글 쓰는 아르바이트를 채용해야 했을 때,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를 물었더니 면접자가 한 대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전 남의 책 안 읽어요." 그의 꿈은 본인 책을 출간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으로 치면 귀는 없고 입만 있는 셈인데,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왜 소통의 매개인 책을 선택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나는 중고서점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황홀한 동시에 그 기세에 압도당하면서도, 이토록 많은 책들이 읽힐까 걱정하면서도, 서가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토록 다양하고 많은 인생이 공존하는 사회는 썩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책과 인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생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책의 존재가치는 '소통'이라는 것이다. 남의 책을 읽지 않는 인생은 괜찮지만, 남의 책을 읽지 않는 작가는 안 된다는 뜻이다. 책은 읽혔을 때 비로소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 읽히지 않는 책이 가치가 없느냐라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하루에 쏟아지는 책들 중 과연 몇 퍼센트나 읽히겠는가. 작가가 누군가와 소통을 목적으로 책을 쓸 때, 나는 그 책이 이미 읽힌 책이라고 생각한다.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중 상당수가 귀를 닫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도서검색창에 '괜찮아'를 검색하면 오늘을 기준으로 총 930권이 검색된다. 정말 괜찮은 건가. 괜찮다면 뭐가 그렇게 괜찮은 건가. 유행이다 싶으면 너도나도 우르르 같은 말을 반복한다.(물론 모든 '괜찮아'책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랍니다.)



독자를 위한 글을 쓴다


아는 분은 알고 모르는 분은 모르겠지만, 나는 2019년의 시작과 더불어 회사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집에 처박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 뒤처리 과정이 남았지만 어쨌든 원고를 완성했고, 곧 그 많은 책들 사이에 내 이름으로 된 한 권을 끼워 넣게 된다.


잠도 안 오고, 머리도 아프고, 기타 레슨이 당장 코앞인데 아직도 계이름을 못 찾겠고, 한 달 동안 한 번도 켜지 않았는데 인터넷 비용은 꼬박꼬박 지불하고 있어서 억울한 마음에 누워있다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를 켜고는 제목도 거창하게 '작가란 무엇인가'라고 써놓고는 (동명의 책이 있습니다.) 깜빡깜빡하는 커서 속도에 맞춰 눈만 꿈뻑꿈뻑하며 앉아있었다. 두 번째 책 작업도 시작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두 번째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써 내려가다가 나는 글을 왜 쓰는가, 내가 쓴 글은 소통을 위한 글인가,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는가 따위를 생각하고 나니 글쓰기가 어렵고 피곤해졌다.


작가란 무엇일까? 네이버 지식백과를 검색해보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를 위한 글을 쓴다'라고 적혀있다. 또 다른 사전에는 '타고난 언어감각과 문장력, 표현력, 창의력, 추리력을 갖추어야 하며, 역사나 사회현상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장시간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인내력이 요구되며,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세밀 관찰력과 호기심이 요구...' 네?


작가에 대한 길고 장황하고 어려운 정의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추려내자면 '독자를 위한 글을 쓴다'이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서비스직 종사자이며, 책은 독자와의 소통을 위한 매개체다. 지난겨울, 한 소설가에게 소설 특강을 들었다. 종강을 앞두고 무엇이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라는 그의 말에 "이렇게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작가인가요?"라고 물음을 던졌다. 그는 작가와 비작가를 '등단 여부'로 구분했다.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등단하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등단이라는 제도는 한국과 일본에만 존재하며, 미국 등 나머지 국가에서는 책 한권만 출간해도 작가로 인정받는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그는 등단한 소설가였다.


나는 작가의 머리와 마음 안에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가 아닌가로 작가와 비작가를 구분하고 싶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 나는 내가 뭐가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에 책을 쓰고, 또 쓰게 된다면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을 갖고 글을 썼으면 좋겠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누구를 위하여 글을 올리는지는 명확히 아는 사람이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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