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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10. 2019

인생은 디테일

나의 거문고, 기타


매주 주말마다 기타를 배우고 있다. 주말에 기타만 배우면 다행인데, 카펫 위에 함부로 늘어놓은 장난감처럼

여러 가지를 동시에 벌려놓은 탓에 도무지 기타를 연습할 시간이 없다.


레슨 때마다 "다음 주엔 꼭 연습해올게요..."하고 기어들어가는 죄인의 목소리로 선생님께 굽신거리지만, 믿었던 다음 주는 금방 이번 주가 되고 이번 주에도 역시 기어들어가는 죄인이 되고야 만다. 다음 주에도 나는 기어코 죄인이 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용하다는 선녀님처럼 100%  맞출 수 있다. 그래, 물론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다. 그렇지만 인생에는 적당한 핑계도 필요하며, 핑계에 핑계를 거듭한 뒤에도 여유가 있는 인생을 원한다. 그래야 방 한구석에 세워놓은 기타도 좀 생각나고, 오선지도 펼쳐볼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게 누가 그렇게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일을 벌이라고 했습니까.)


믿었던 다음 주가 바로 내일이 되면, 급한 마음에 비로소 기타를 부여잡고 오선지를 들여다보며 끙끙거린다. 믿을 수 없다. 이걸 내가 배웠다고? 겨우 용기를 내 몇 분 띵띵 거리다 보면 한숨이 푹 나온다. "하... 그만둘까." 참고로 내가 배우고 있는 교본 맨 앞장에는 '미취학 아동도 즐겁게 배울 수 있는...'으로 시작하는 머리말이 나온다.


순전히 연습부족이지만, 레슨 때마다 새까맣게 잊힌 지난 시간의 레슨 내용을 복기하며 참회하는 심정으로 기타 줄을 더듬다 보면 시간도, 돈도 아깝다. '이렇게 손가락만 더듬거리다가 언제 제대로 된 곡 연주하나.' 싶은 생각뿐이다. 낙엽 발끝에 사그락사그락 밟힐 때 기타 수업을 시작해, 이제는 장미도 지고 어엿한 여름이 다 왔는데 어찌 내 기타 위의 내 손가락은 아직 이리도 부끄럽단 말이더냐. 오호라 통제라.


'그래, 나는 원래 첼로를 배우고 싶었잖아!' 어쩌면 나와 기타는 애당초 맞지 않는 인연일 수 있겠다고, 내 안의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인다. 깊고 그윽하고 우아하기까지 한 첼로가 나와 제격이 아니겠는가! 신나게 첼로 교습소를 찾아보는 한편, 레슨 시간에 기타 선생님에게 고백했다.

"선생님, 저 기타에 흥미를 잃었어요." 파워 당당.


늘 묵묵한 선생님의 눈동자 위에 자리한 눈썹 털이 0.1초 정도 잠깐 흔들렸던 것 같기도 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선생님은 레슨을 계속했다. 기타 줄 위에서 하염없이 부끄러운 내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춤추는 손가락을 보며 다음 달엔 등록 안 해야겠다, 가만히 생각했다.


통보 2주 뒤인 어제, 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이 나에게 갑자기 물었다.

"여전히 기타에 흥미가 없으세요?"

"아..."

별 신경 안 쓰시는 줄 알았는데, 잠깐의 침묵에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엉겼다.

"음... 선생님, 그거 아세요? 요리 배우면 뭐라도 해보고 싶잖아요. 근데 주방 구석에서 주야장천 파만 썰고 있는 기분이에요. 저도 빨리 정성하 곡도 치고 싶고, 코코 주제가도 치고 싶은데..."

선생님이 조용히 대답했다.

"물론 카피하면 실력 빨리 늘죠. 실력 늘리는데 카피만큼 좋은 게 없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곡만 카피 잘 하면 뭐해요. 악보를 못 보는데. 지금 악보 보면 칠 줄 아시잖아요. 음악은 그게 다예요." 

다시 빗소리.

"지금 배우는 교본 있잖아요, 그거 1권 2권에 실린 곡들. 그것만 수려하게 칠 줄 안다면 더는 기타 안 배워도 돼요. 코드 짚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어떤 정서로, 어떻게 터치할 건가, 어떤 톤을 만들 건가... 이게 음악이에요."

미취학 아동을 위한 교본이라도 거기 담긴 곡들을 '제대로' 칠 줄 안다면, 그게 음악이라는 선생님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내 마음이 담긴 손가락에선 늘 '띠용'하는 경박한 소리가 나고, 선생님이 수차례 지적해도 구부러진 엄지는 펴질 줄 모른다.

"정서를 어떻게 담아요? 제 기타에서는 맨날 띡띡띠용 하는 소리밖에 안나잖아요." 하고 물었다가

대답 없는 선생님의 얼굴을 한번 보니

"... 연습이겠죠?"라는 김 빠진 대답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연습밖에 없죠." 선생님이 답했다.

 

결과보단 과정이라고, 과정을 충실히 음미하는 사람이 되자고 줄곧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면서도 내 눈은 늘 눈 덮인 산꼭대기만 바라보고 있나 보다. 요리를 배울 때도 늘 그렇다.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싶은데 굵은소금과 가는소금을 나누어 쓰고, 재료의 성질에 따라 집간장과 진간장을 나눈다. 성질이 급해 채를 대충 썰고 나면, 소금간이 잘 안 배거나 잘 뭉쳐지지 않는다.

"에이, 뭐 사람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라는 말로 괜히 눙쳐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차이가 뭐 그리 많은 것을 바꿀까 싶지만,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이걸 머리론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몸으로 실천이 안 된다. 머리에서 몸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 멀다.

 

옛 어른들이 정신 수양을 위해 거문고를 타던 심정으로, 기타를 나의 거문고 삼아봐야겠다. 마침 현도 6개로 같으니. 한 음, 한 음에 내 정서를 담아서 제대로 타봐야겠다. 더듬더듬거리다 <산울림>의 노래처럼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게 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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