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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un 15. 2019

우후산책

읽을거리가 너무나 많다


신중하게 책 두 권을 골라 가방에 넣고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타노스가 손가락을 퉁 튕기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비가 마구 쏟아졌다. 하늘 한구석을 부욱 찢고는 지구를 쓸어버리겠다는 양 대단한 기세로 퍼붓는 비. 작은 창을 열고 뜨겁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성에 차지 않아 현관문을 빼꼼 열어봤는데, 맹렬한 빗줄기의 기세에 눌려 금세 문을 닫았다.


공원에 나가서 책을 읽겠다는 계획이 틀어졌으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 쑥갓과 가지를 가득 넣어 떡볶이를 한 솥 만들었다. 후후 불며 맛있게 먹고 있자니 어느새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문을 열어 바라본 하늘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영화에선 타노스가 손가락을 퉁긴 그 순간 이후 5년의 암흑기가 이어지는데, 현실에선 고작 30분 만에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아이언맨의 희생도 필요 없고.(그 장면에서 좀 울었기에. 아이언맨 사랑해요!)


아무래도 가방이 무거운듯해 두 권을 놓고 잠깐 고민하다 한 권을 골라 밖으로 나왔다. 막 비가 온 뒤라 공원에 가면 쌀쌀할 테지만, 맨살에 부딪는 신선한 공기를 느끼고 싶어서 카디건을 챙기지 않았다.(한 시간 뒤 떨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여권이 필요 없는 여행


물기를 머금은 나무들이 저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공원에 들어설 때마다 그 모습을 보며 '이건 반칙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오늘도 역시 공원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 이건 반칙인데.'하고 생각했다. 표현할 수 없는 갖가지 층위의 초록이 한 군데 모여 빛을 뿜고 있었다. 그 빛이 날마다 다를뿐더러 시시각각 아름다움을 더하니 반칙이라고 할 수밖에. 그 모습을 자주 지켜보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내 뒤에서 전화통화를 하던 아줌마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렀다.

"... 걸렸구먼. 우리 외국으로 여행 간 거야. 알았지?"

아줌마는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과 외국으로 여행 갔다고 입을 맞추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짙은 초록 사이로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 피식, 나도 모르게 웃었다. 여기가 외국이 아니면 어디겠냐 싶어서. 이곳 공기의 밀도와 선도와 색채는 5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짙푸르고 축축한 나무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삼보일찰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삼보일배'라고 한다. 출퇴근길 위에서의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잽싸게, 누구보다 아슬아슬하게 걷고 또 뛰지만 공원에서의 나는 '삼보일찰'을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살핀다는 뜻의 '찰'이기도 하지만, 실은 핸드폰 셔터음이다. 찰칵. 조금 걷다가 찰칵, 또 걷다가 찰칵, 찰칵. 아무리 애를 써도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욕심을 부려본다. 하늘에 하얗게 걸린 달도, 잎사귀 끝에 걸린 물방울도, 가만히 공기를 가로지르는 새의 날갯짓도, 그러니까 아무것도 제대로 담을 수 없다. 우거진 나무 아래서 물방울을 관찰하다가, 이 모든 것은 대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걷는다. 아주 천천히. 물기를 머금은 서늘한 공기가 팔에 닿는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잎사귀가 머금었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짙어진 나무줄기를 살짝 눌러보았다. 축축하다. 온몸으로 물을 빨아들였구나.


바로 곁에 등걸이 있어서 그 위에 잠깐 올라가 세상을 살폈다. 세상을 무대 삼으라는 광고 카피가 문득 떠올랐지만, 나는 그저 두발에 꼭 차는 이 등걸 정도면 내 무대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나무의 일생을 디디고 서있다. 내게 그만한 자격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내려왔다.



무색하고 어색할 때면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형광색 조끼를 맞춰 입은 어르신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린다. 산책을 하는 연인들이 보이고, 유모차를 미는 가족이 있다. 읽으려고 챙겨 온 책 생각이 나서 벤치에 잠깐 앉았지만,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곁의 푸른 잎사귀에 힐끔힐끔 눈길을 주다 책을 덮어버렸다. 책 말고도 읽을거리가 너무 많았다.


하얗게 걸려있던 달이 살그머니 빛을 내기 시작했다. 때맞춰 공원의 가로등에도 불이 반짝 들어왔다. 요즘의 나는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고, 감기가 낫지 않아 너무 답답하고,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사는 기분이라 슬프다. 이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어딘가 무색하고 어색해질 때면 가만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추천한다.


시시각각으로 하늘 색깔도 바꿔주고, 가로등처럼 달도 틀어주고, 가만가만 부드러운 바람으로 등을 쓸어주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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